70년대의 가난한 갯벌 마을과 대도시의 피폐함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담을 담은 <초승달과 밤배>는 30~4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이다. 故정채봉 선생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장길수’ 감독의 7년만의 신작은 오랜 세월을 못 이겨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의 파편을 불러들이는 묘한 응집력이 있는 작품으로 와 닿는다.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그런 감정을 잘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그맣고 아련한 이 작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유년의 슬픔이 촉촉하게 밀려들어와 오래도록 또렷한 인상을 각인할 것이다.
‘난나’는 아버지가 다른 동생 ‘옥이’가 너무 싫다. 옥이 때문에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병신 동생의 오빠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옥이를 몇 번이나 버리고 끊임없이 미워하지만 동생 옥이는 언제나 자신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변함없이 오빠의 곁을 지키려 한다.
할머니(강부자)와 외삼촌(기주봉)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온 후, 난나와 옥이는 더 힘든 삶에 직면한다. 서울역 앞에서 큰 제과점을 하는 아름다운 사모님(양미경)이 자신들의 엄마였으면 하는 이 남매의 바람도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대도시의 삭막함에 가려 대답 없는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장길수 감독은 정채봉 특유의 사회적인 정서가 서정적으로 녹아든 원작에서, 사회적, 정치적인 소재나 설정을 걷어내고, 남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그 안에서 생기는 애틋한 감정에 영화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난나와 옥이의 관계를 통해 영화를 보는 이들은 70년대로의 회귀를 갈구하면서 마치 슬픈 동화를 읽어 내려가는 듯한 정서적 충만감에 도달한다.
세상과 화해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인생의 고통은 난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다. 성장을 위한 미션은 아니더라도 장길수 감독은 영화 안에서 옥이를 매개체로 소년 난나가 세상과 소통하고 미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연출해 인생의 의미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놓치지 않고 있다.
한국 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끈 ‘장길수’감독이 전작들에서 사회를 향에 들이댄 날카로운 칼날은 <초승달과 밤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우리가 잊고 지내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한 개인의 삶을 조망하면서 탐구해낸 그의 시선은 동시대의 또 다른 날카로운 ‘눈’이 될 것이다.
천사의 날개를 얻은 ‘옥이’와 동생을 보듬을 수 있는 ‘오빠’로 성장한 ‘난나’가 지난 시절의 우리 누이에 대한 찬가로 비쳐지지 않아 참 다행이다. 만약에 누이에 대한 찬가로 영화가 읽혔다면, <초승달과 밤배>는 너무 구닥다리 영화로 보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