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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상 뒤에 숨겨진 성폭력의 은유
키리쿠와 마녀 | 2001년 3월 7일 수요일 | 김응산 이메일
키리쿠와 마녀 포스터 감독 미셸 오슬로(Michel Ocelot) 처음 이 비디오를 보겠다고 했을 때, 나의 선택이 옳은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을 했었다. 실사영화에 비해 애니메이션을 즐겨보지 않는 필자의 편식취향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작품의 배경은 아프리카이지만 제작을 한 사람들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에서 어쩔 수 없이 의심되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냄새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비디오를 보자마자 필자의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색채는 필자를 이내 흥미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삭제하되 그렇다고 하여 어느 무엇도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 덤덤한 톤의 아름다운 영상은 애니메이션에 문외한인 본인마저도 감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는 배경이 꼼꼼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어지럼증을 유발시키는 저패니메이션이나, 색감이 거친 미국의 애니메이션과 비교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키리쿠와 마녀' 중에서
애니메이션 '키리쿠와 마녀' 중에서
애니메이션 '키리쿠와 마녀' 중에서
감독의 가장 최근작인 '왕자와 공주' 중에서
감독의 가장 최근작인 '왕자와 공주' 중에서
프랑스인이 만들기는 했지만 색이든 배경 음악이든 모든 부분에서 아프리카적인 토속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던 점도 필자를 만족하게 한 부분이다. 실제로 감독인 미셸 오슬로(Michel Ocelot)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당시 갓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던 서아프리카에서 보냈는데, 그런 성장 배경의 인물이 감독이라면 으레 깔리게 될 식민통치의 향수라든지, 아니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든지를 이 작품에서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시놉의 바탕도 프랑스에서 온 것이 아닌 서아프리카 민담에서 온 것이다.

이와 같은 다분히 기술적인 부분이 흥미를 끄는 것만큼이나 내용면에서도 이 작품은 필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태어나기 전부터 말을 할 수 있는 영특한 아이 키리쿠는 일반적인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터무니없이 작지만 특유의 현명함과 재능을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고, 결국 마녀까지 구원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수많은 교육용 애니메이션과 다를 바가 없지만, 이 작품은 그 이면에 너무나도 많은 하위 텍스트들을 숨기고 있다. 정작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내러티브에 내재한 하위 텍스트들이다.

키리쿠는 마녀 카라바가 왜 나쁜지에 대해 궁금함을 가진다. 그런 그의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은 간단하다. "그녀가 마녀이기 때문이야.(parce que c'est une sorciere)" 결국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마녀가 나쁜 이유는 그녀가 마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범하곤 하는 치명적인 어법상의 오류이다. 마녀(la sorciere)라는 말에는 이미 '마법을 사용하여 나쁜 짓을 하는 여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키리쿠가 궁금해하는 부분은 마녀가 왜 마녀가 되었을까지 마녀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차 드러내는 순환논증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가 여타의 등장인물들과 구분되는 점이 이것이다. 키리쿠는 마을을 마녀에게서 구해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녀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녀 역시 구원을 해낸다. 이 지점에 이르면 적과 아가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키리쿠의 계속되는 "왜"라는 질문에 문제 해결의 모든 열쇠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엔 단순해 보여도 아동용 오락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왜 카라바는 마녀가 되었을까? 내용상으로 보면 그녀는 '마을 남자들이 등에 가시를 찔러넣은 뒤에 몸이 아프게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흉폭해졌다'고 한다. 어렵고 복잡한 정신분석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이것이 강간을 은유하고 있음은 쉬이 알 수 있다. 카라바가 유독 마을 남자들만을 마법의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런 의심에 확증을 준다. 마을사람들이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가 샘이 말랐기 때문이라는 사실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생명의 원천인 샘은 여성, 특히 모체의 문학적인 표현인데, 하필 카라바는 그 샘을 마르게 만든 것이다.

키리쿠는 앞서 말한 "왜"라는 탐구의 언어를 통해 카라바의 본질을 파악해 내고 그녀의 아픔, 곧 등에 박혀있는 가시를 뽑아준다. 남근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가시는 카라바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본질적인 상처를 의미한다. 역시나 주지할만한 사실은 그녀의 가시를 '누가' 뽑았는가이다. 키리쿠는 명특하고 재능도 많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몸집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키리쿠가 마을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때마다 지겹도록 흘러나오는 마을 사람들의 노래 중 다음의 두 소절만이 계속 반복된다. "키리쿠는 작지만 용감하지(Kirikou n'est pas grand, mais il est vaillant)", "키리쿠는 작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지(Kirikou est petit, mais il peut beaucoup)" 우리말의 억양법과도 같은 이 노래가사는 작다는 것이 핸디캡임을 의미한다. 작기 때문에 얻게되는 숙명적인 키리쿠의 타자성은 카라바의 그것과 비견할만한 것이다. 키리쿠가 성인 남성이 아니라 아이, 곧 성성이 발현되지 않은 제 3자적 존재라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진 않다.(키리쿠는 카라바의 아픈 상처가 나은 다음에야 성인이 된다.) 결국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는 결론부는 정치성이 떨어지지만, 어쨌든 '타자들'끼리 이루어내는 '상처 어우르기'는 다분히 의미있는 시각이다.

어쨌든 비디오를 보면서 하위 텍스트 분석에 시간을 소모하지 않더라도, 본 작품을 그냥 앉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나 값진 일이다. 저패니메이션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 작품은 시원한 바람과도 같은 개운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필자가 느꼈던 감동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다.

2 )
ejin4rang
없어져야돼   
2008-10-17 08:46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4:3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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