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하나로 더위와 씨름하고 있는 두 남자. 그들은 간출한 속옷차림으로 좁은 여관방에서 서로의 땀과 체온을 느끼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같이 생활하고 있다. 한 명은 정체가 들통 난 프락치 ‘K’이고, 덩치 큰 사내는 그를 감시하는 기관원 ‘권'이다.
서울 변두리 여관에서의 생활이 지치고 무료해질 때, 그들은 방안에 굴러다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시나리오 삼아 둘만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점차 엉터리 영화에 열중하는 K와 권. 우연히 옆방에서 투숙하던 소녀가 그들의 방에 초대되고 K와 권의 설명하기 힘든 유대감은 커진다.
'프락치‘는 지금 세대에게 생소한 단어이다. 정부가 조직이나 단체를 와해, 또는 정보를 깨내고자 잠입시킨 위장정보원을 일컫는다.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이 거셀 때, 프락치의 활동도 그만큼 맹위를 떨쳤다. 현재도 그들이 활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황철민‘감독은 세기가 바뀐 지금, 그들을 다시 스크린에 불러들인다. 프락치는 그 단어의 뜻만큼이나 관심 밖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러 그들을 지금에 와서 재조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프락치>는 이 궁금증에 대해 명확하게 답변하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오욕의 현대사가 멀게만 느껴질 만큼, 우린 너무 빨리 그들을 잊었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인물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영화의 태도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프락치의 의미를 생각해 내려는 관객의 진을 빼놓는다. 특별한 사건 없이 오직 두 남자의 무의미한 대화와 ‘죄와 벌’이 주는 상징성만 그들의 과거와 미래를 추측하게끔 복선을 깔아줄 뿐이다. 또한, 밀착한 카메라-감독의 카메라와 권의 카메라-는 K와 권의 답답한 생활을 생생하게 전해주지만 영화의 명확한 밑그림이 되는 배경과 인물간의 또렷한 몽타주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프락치의 존재만큼이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기만의 역사에 대해 감독의 관점은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게이코드로 읽히는 두 남자의 살부딪힘은 영화의 주제를 이해함에 있어 참고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여성을 강간해 두 주인공의 깨지기 쉬운 유대감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계급문제까지 건드려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두려한다. 이러한 것들이 맞물리면서 <프락치>의 전체적인 주제-국가권력의 흉포함 앞에서 정의내릴 수 없는 개인의 정체성-가 나오는데 참고서 역할을 해야 할 설정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 영화는 복잡하게만 다가온다. 객관적인 태도는 영화 안에서 제대로 방점을 찍지 못해 프락치가 활동하던 시대를 현실감 있게 불러들이지 못한다. 아주 먼 과거 얘기도 아닌데도 말이다.
<프락치>는 그 시도만으로도 가치 있는 작품일지는 모르겠으나 독립영화하면 떠오르는 사회반영성 때문에 대중적인 영화로써의 매력은 덜하다. 그러나 프락치가 활동하던 그 시대를 지금 막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빨리 잊은 우리의 무심함이 ‘무지’로 굳어버린 게, 더 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