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랑, 신. 과연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침묵의 3부작, 그 침묵의 의미
그리스가 독재를 종식지은 후에도 앙겔로풀로스 영화의 근본정서는 비관적인 것이었다. 독재에 반대했던 좌파 진영이 뿔뿔이 흩어져 혼란스런 현실에서 앙겔로풀로스는 침묵의 3부작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비키퍼> <안개 속의 풍경>을 연달아 내놓았다. 각각 역사의 침묵, 사랑의 침묵, 신의 침묵이라는 부제를 가진 일련의 작품들은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과거는 신화가 일깨우는 희망과는 아무 상관없으며 현실은 견딜 수 없고 미래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혼란스러운 그리스 사회. 앙겔로풀로스는 영화를 통해 지식인이자 예술가로서 좌표의 상실감을 느끼는 절망의 상태에서, 과연 무엇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를 자문하고 있는 것이다. <비키퍼>는 ‘사랑’에 기대를 걸어본 작품. 간절한 기대에 대한 답은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것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뻐아픈 좌절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침묵의 뒤에는 반드시 희망이라는 여운을 남겨둔다. <안개 속의 풍경>에서 언덕 위의 나무를 향해 천천히 내딛는 남매들의 작은 발걸음처럼 <비키퍼>는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어딘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스피로의 손을 비추며 마무리되고 있다.
인생의 쓴 맛과 단 맛, 그 오묘한 조합 깊이 있는 성찰이 돋보이는 정교하고 중의적인 설정
<비키퍼>는 ‘꿀벌치기’를 뜻하는 그리스 원제 ‘멜리소코모스’나 프랑스어 제목 ‘라삐꿀뙤’로 널리 알려진 작품. 정치나 역사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역사적 서사에 천착해오던 앙겔로풀로스에게 전환점이 된 작품’(르 몽드)으로 평가받는 <비키퍼>는 시정(詩情)이 넘치는 풍부한 은유와 상징을 통해 인생에 대한 거장의 무르익은 성찰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젊음, 싱싱한 청춘의 이미지를 가진 봄의 들판, 그곳에 늙고 지쳐버린 주인공이 생의 달콤함을 상징하는 꿀을 모으러 다닌다는 설정은 인생의 황혼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상실감, 무상함 등 미묘한 감정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족들이 흩어지는 모습이나 깨진 유리, 빈 테이블의 이미지들은 모두 분열과 헤어짐, 상실과 새로운 만남을 담아낼 여백을 상징한다. 또한 스피로의 잔잔한 일상에 뛰어든 히치하이커 소녀를 통해, 미래를 위해 젊음을 바쳤고 이제 남은 것은 쓸쓸한 추억뿐인 과거에 사는 남자와 지금 이 순간 현재에만 매달려 있는 젊은 여자의 대비를 보여준다. 스피로는 그녀를 통해 미래를 붙잡고 싶어하지만 그녀에게 미래는 또 다음 순간의 우연한 만남일 뿐그들 사이에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그녀에게 사랑과 생명력을 갈구하는 스피로, 그러나 사랑은 허락되지 않고, 침묵할 뿐이다. <비키퍼>는 여러모로 인생의 쓴 맛과 단 맛이 오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비키퍼>의 명장면들! 유리창을 향해 돌진하는 트럭씬! 텅 빈 극장에서 벌어진 격렬한 정사씬! 스피로가 죽음을 맞는 라스트씬!
한참을 카페 옆에 멈춰서 있던 트럭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서는 거침없이 유리창을 들이 받는다. 히치하이커 소녀가 다른 남자들과 앉아있는 카페 유리창을 향해 스피로가 돌진하는 이 장면은 사건 자체의 묘사를 통해서보다는 주변 풍경의 스케치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앙겔로풀로스 특유의 스타일이 또 한번 힘을 발휘한 대목. 질투와 열정에 사로잡힌 스피로의 착찹한 내면이 세련된 연출로 드러나있다. 무엇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장면은 낡고 텅 빈 극장무대에서의 정사 씬. 유혹과 거절의 제스추어를 교환하던 스피로와 소녀가 온몸으로 서로를 부르는 장면이다. 아마도 정사를 이만큼 리얼하고 섬세하게 다룬 영화는 없을 것이다.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직 두 사람의 격렬한 숨소리 뿐, 관객은 10여 분간 숨을 죽인 채 이 명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그렇게 하룻밤을 함께 보낸 뒤, 자신을 보내달라며 떠나버리는 소녀. 다시 혼자 남은 스피로는 벌통이 놓인 들판에 망연자실한 채로 앉아있다. 관객을 정면으로 향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 텅 비어버린 눈길을 보내는 스피로는 갑자기 벌통을 열어젖히고 벌떼에 쏘여 죽음을 맞이한다. 인생의 마지막 손님으로 죽음을 초대하고 맞이하는 듯한 스피로의 생애, <비키퍼>의 라스트 씬은 마스트로얀니의 탁월한 연기와 함께 사랑으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쓸쓸한 마지막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아내었다. 사랑을 통해서도 좌절된 커뮤니케이션, 그러나, 앙겔로풀로스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면은 절망의 제스추어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은 대지를 두드리며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마치 수감자들의 신호처럼. 이 순간 그는 또 한번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영화계 최고의 고수들이 모였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주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시나리오 토니노 게라, 촬영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 음악 엘레니 카라인드루 환상의 콤비플레이!
<비키퍼>는 그야말로 세계 일류 배우와 스텝들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 비토리오 데 시카의 <해바라기> 따비아니 형제의 <로렌조의 밤>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등 주옥같은 걸작들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10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만들어낸 전설적인 시나리오 작가 토니오 게라가 앙겔로풀로스와 함께 쓴 시나리오에, 주연은 감독 자신이 최고의 배우로 격찬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앙겔로풀로스의 영상미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충분한 시간을 활용하면서도 유려한 쁠랑 세깡스 촬영에 능한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가 카메라를 지켰으며 엘레니 카라인드루가 정확한 타이밍에 파고드는 주제음악으로 화면 가득 우수에 찬 선율을 더해주고 있다.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를 제외한 <비키퍼>의 스텝들은 모두 앙겔로풀로스의 침묵의 3부작에 참여하고 있어 각 작품에 독특한 색깔을 주면서도 일관된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침묵의 3부작은 깊이 있고 시적인 대사, 긴 호흡으로 마련한 여백의 공간에 관객의 사유를 머물게 하는 활영, 감성적이고 호소력 짙은 음악을 고루 갖춘 것!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앙겔로풀로스의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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