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반복된다, 거짓말도 반복된다 - 에스프레소 만큼 쓴 연애 백서 <여름이 가기 전에>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을 한다지만, 그 사랑이 힘겨운 순간들도 찾아온다. 그리고 행복이 불행이 되는 많은 경우는 거짓말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 위태로운 연애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혹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뻔히 보여도 모르는 척 속아 넘어가기도 한다.
<여름이 가기 전에>의 주인공 소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미 한 번 헤어졌던 사이인 이혼남 민환을 잡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 민환에 대한 미련을 감추면서도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기 바라면서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재현에게는 민환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선택했지만, 결국 영화 후반부에 가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절규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잡히지 않는 사랑의 허망함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의 사랑은 많은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지만, 단지 그것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되거나 사랑 앞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 앞에 이기적이면서도 나약한 연인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헤친 성지혜 감독의 <여름이 가기 전에>는 에스프레소 만큼이나 쓰디 쓴 연애 백서로 기억될 것이다.
스물 아홉, 나에게 필요한 건 사랑일까, 현실일까? - <여름이 가기 전에>의 ‘여름’이 갖는 의미
<여름이 가기 전에>에서의 ‘여름’은 주인공 소연이 방학을 맞아 귀국해서 보내는 짧은 한 철을 뜻하기도 하지만, 극 중 스물 아홉의 나이로 등장하는 그녀가 겪는 20대의 마지막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아름답고 찬란한 젊음의 시기인 20대를 뒤로 하고 30대를 눈 앞에 둔 이 시기에는 이상과 현실 간의 장벽이 가장 아득하게 느껴지며 일, 사랑, 결혼 등을 비롯한 인생 전반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소연이 맞는 20대의 마지막 여름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사랑에 대한 망설임으로 채색된다. 소연은 서울에서 새로 만난 재현과 함께 있을 때 더 많이 웃고 더 화사하다. 하지만, 잊지 못하는 옛 애인 민환과 함께 있을 때는 그의 눈치를 보고 주위의 시선을 살핀다. 그녀에게 있어 외무관 민환은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현실적인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녀가 민환 앞에서 보이는 서투른 행동들은 그 사람을 갖고 싶은 욕망, 더 나아가 그를 닮고 싶은 욕망을 보여주며 그를 통해 성공적인 삶의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고시생 재현은 젊은 날의 순수를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면서도 눈 앞에 닥친 현실의 무게를 깨닫게 해 주는 존재이다.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소연의 모습은 인생의 전환점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느꼈을 혼란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젠틀맨 이현우, 제대로 ‘나쁜 남자’가 되다 - 배우 이현우의 재발견
‘실장님 전문배우’란 얘기를 듣고 있는 부드러움의 대명사 이현우. 깔끔하고 매너 좋고 능력 있는 남자로서의 이미지가 각인된 그가 <여름이 가기 전에>에서는 이기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나쁜 남자’의 캐릭터를 선보인다.
그가 연기한 민환은 이미 헤어진 사이인 소연에게 갑자기 보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달음에 내려오게 만들어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 날 다시 올려 보내는 냉정한 남자이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아무런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소연 역시,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여자의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고 초라해지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나쁜 남자’의 전형이 바로 <여름이 가기 전에>의 민환인 것이다.
이현우는 몇 편의 드라마와 영화 <S 다이어리> 등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지만 영화에서의 단독 주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지혜 감독은 이현우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목소리가 흔들림 없는 민환의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적역이라 생각하여 처음부터 그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이현우로서는 지금껏 갖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선 캐릭터이기 때문에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영화 속에서의 그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민환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은 캐릭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몰입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배우 이현우의 또 다른 잠재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씩씩하고 당찬 이미지의 그녀, 사랑 앞에 약한 모습으로 돌아오다 - <친구>의 히로인 김보경의 새로운 복귀
영화 <친구>에서 교내 밴드 ‘레인보우’의 보컬 진숙 역을 맡아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며 장동건과 유오성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배우 김보경은, <여름이 가기 전에>에서 사랑 앞에 나약한 여심을 연기하며 영화계로의 컴백을 과시한다. 시나리오를 받는 순간, 꼭 자신이 연기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는 그녀는 사랑을 하고 있지만 외로운 심정,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눈물 어린 연기를 통해 감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007년 한국영화의 화두는 다양성! 그 첫 포문을 여는 완성도 높은 멜로 영화 <여름이 가기 전에>
2006년 한국영화계는 기존의 흥행 최고 기록을 경신한 <왕의 남자>를 시작으로 이후 다시 한번 최고 기록을 갱신한 <괴물>로 인해 그 산업적 규모가 엄청나게 확대된 듯하다. 하지만, 실상을 파헤쳐 보면 스크린쿼터의 축소, 비슷한 기획 영화의 양산, 한국영화 수출 실적의 감소, 그리고 하반기 들어서 위축된 투자 자본의 영향에 따른 제작 과정의 동결 등 여러 가지 불안 요소 역시 가중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2006년 하반기에 등장한 저예산 영화들은 다양한 장르를 탐색하고 야심에 찬 시도를 보이며 무게감 있는 주제 의식을 선보여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 전계수 감독의 <삼거리극장>, 신동일 감독의 <방문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 영화들은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모두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역시 2006년 한국영화투자조합 및 영화 다양성을 위한 전문투자조합 출자사업을 실시하여 저예산 영화 전문 펀드를 설립하고 나섰고, HD영화제작 지원사업 역시 그 규모를 확대하여 편당 5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게 됐다.
2006년 말 거대 산업 시장의 틈새에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 준 작지만 힘 있는 영화들의 등장, 한국 영화의 다양성 확보에 대한 확실한 공감대 형성, 거기에 그 논의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원 사업의 확대 및 전문 펀드 설립은 2007년의 한국 영화계를 한껏 기대하게 해 준다. 그리고 새롭게 꿈틀대는 기운의 첫 시작을 성지혜 감독의 완성도 높은 멜로 영화 <여름이 가기 전에>가 열어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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