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관계성에 대한 기괴한 재해석
‘나는 나의 관계자이다’
17살의 여고생 노리코는 집이 정전되는 순간, 충동적으로 가출을 감행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단순히 부모와 자식, 언니와 동생이라는 가족구성원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이해하려는 척, 잘되기를 바라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의 가식적인 행동들에 신물이 난 것이다.
가족구성원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 핏줄로 옭아매기만 하는 가족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그 또래 아이들과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에 집착했던 노리코. 그녀는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있는 코트 소매의 붉은 실밥을 탯줄이라 여기며 잡아 뜯는다. 그리고 대화명이었던 ‘미츠코’라는 이름의 새로운 자아로 자신을 재정립하기에 이른다.
<노리코의 식탁>은 노리코가 주어진 환경에 고스란히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익명성을 통한 자아 재창조를 현실로 확장, 미츠코로서 스스로에게 관계해 가는 독특한 관계성을 제시하고 있다.
‘누군가는 토끼 역할을 해야만 해’
폐허닷컴에서 만난 쿠미코 일행은 노리코에게 자살, 살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행복하려면 역할을 나눠야 해. 연인끼리, 부부끼리, 부모 자식이 역할을 바꿔보고 자기가 잘하는 역할을 맡으면 돼. 정글의 약육강식과 마찬가지야. 사자뿐만 아니라 토끼도 필요한 거야. 누군가는 사자가 되고 누군가는 먹혀야 돼.’
이 영화는 자살이 이 세상을 무리 없이 굴러가게 하는 자의 역할이라 여기고 있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의 여고생들을 통해 먹이사슬처럼 치열하게 먹고 먹히는 현대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붕괴되는 현대 가족의 불완전한 대안 – 렌탈가족
이 세상에서 가장 동생다운 동생, 누나다운 누나, 엄마다운 엄마… 세계 어디에 이처럼 가족다운 가족이 있지?
시골 생활에 넌더리가 난 노리코는 도쿄로 가출하여 폐허닷컴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쿠미코를 만나 렌탈가족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렌탈가족’이란 고객이 가족의 구성원과 상황을 설정하여 의뢰하면 그에 맞게 팀을 꾸려 정해진 시간 동안 가족 관계를 맺고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쿠미코는 태어나자마자 우에노 역 코인락커 54번에 버려져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를 가득 담고 살아온 소녀로, 핏줄로 얽힌 가족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가족다운 가족이라는 것은 그 구성원의 역할에 잘 맞게 연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쿠미코를 따라 렌탈가족의 팀이 된 노리코 역시 렌탈가족 롤플레이를 함으로써 오히려 인위적으로 구성된 완벽한 가족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15년 전 일본에서 ‘렌탈가족사업’을 하고 있는 20세의 여성을 실제로 만났던 경험이 있는 소노 시온 감독은 역할 연기로 행복한 가족을 순간적으로 완성시킨다는 설정을 통해 사람끼리의 관계성이 희박해져 가고 있는 시대를 그리고자 했다.
소노 시온 감독의 역작 <자살클럽>의 속편 신주쿠 역 54명의 여고생 집단 자살의 배경이 드러난다!
소노 시온 감독의 <노리코의 식탁>에는 2002년 그를 세계적인 컬트영화 감독으로 발돋움하게 한 영화 <자살클럽>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신주쿠 역 54명의 여고생 집단 투신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 이는 이 영화가 <자살클럽>과 평행선상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감독은 ‘당신은 당신의 관계자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자살클럽>에서는 자살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만 주력하고 이 말이 지닌 의미를 숨긴 채 끝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확실히 전달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자살클럽>이 신주쿠 역 54명의 여고생들을 한꺼번에 카메라에 담았다면 <노리코의 식탁>에서는 그들 중 1명에게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 때문인지 <노리코의 식탁>은 <자살클럽>에 등장하는 하드고어적인 장면은 배제하고 노리코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세밀하고 밀도 높게 카메라에 담는 것에 주력했다.
쿠미코가 경영하는 렌탈가족사업의 원념으로 자살 클럽을 절묘하게 엮어 놓고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나게 하는 소노 시온 감독의 탁월한 감각은 관객들에게 이 사회에 대한 뼈 속 깊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2시간 38분의 러닝타임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도록 의도된 미장센은 세계적 감독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는 소노 시온 감독만의 미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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