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이 낳은 위대한 성자 한경직 목사 그의 98년 간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따라간다!
대한민국 기독교의 역사를 넘어 한국 사회의 큰 거목으로 평가받는 故 한경직 목사의 향기로운 일생이 스크린을 통해 되살아난다. 한경직 목사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기획된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 <한경직>은 20세기 대한민국 격변의 시대를 이끌며 고아들의 아버지,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로서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그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담은 작품. 미국인 선교사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설립을 주도했던 월드비전 본부를 비롯해 템플턴 재단, 빌리 그레이엄 센터 등을 찾아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목회자와 유족들의 인터뷰를 카메라에 담았으며, 교회 목회자에만 머물지 않고 평생 전쟁과 재난, 기아에 시달리는 어려운 이웃을 보듬으며 사회 복지 사업과 교육 사업에 힘쓴 그의 강력한 신념과 추진력 등 인간 한경직의 다양한 면모를 되돌아 본다.
청렴고결한 목회자의 모델을 보여준 한경직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복음주의 전도운동에 다양한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교회로 부상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으며, 상금으로 받은 102만 달러를 북한돕기 성금으로 그 자리에서 헌금하면서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돼 봤다"고 웃었던 일화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00년 4월 19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예금통장 하나 없이 평생 청빈한 삶으로 일관한 그의 일생은 기독교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존경을 받았다.
대한민국 기독교의 역사 그 밭 한복판에 우직하게 자리잡은 거목 한 그루. 세계가 인정한 최고의 리더이자 20세기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자 한경직 목사의 98년 간의 기적 같은 일생이 담긴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 <한경직>은 9월 13일 개봉되어 우리의 가슴을 적실 것이다.
한국인 유일 종교계의 노벨상 템플턴상 수상! 목회자들의 목자, 이상적인 리더의 표본을 보여주다!
1991년 12월 22일 템플턴상 심사위원회는 9명의 심사위원단이 만장일치로 한경직 목사를 1992년도 템플턴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해왔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템플턴상은 인류를 위해 영성에 공헌하거나 개척자적인 역할을 한 이들에게 수여되여 의미있는 상으로 해마다 세계적으로 종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종교인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1973년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을 위해 일생 동안 헌신한 테레사 수녀를 시작으로 프랑스 테제 공동체를 이룬 로저 수사, 소련의 망명작가 솔제니친, 세계적인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등이 이 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한경직 목사가 20번째 템플턴상 수상자로 명명되었다.
템플턴상 심사위원회는 1992년 3월 11일 오전 11시 뉴욕의 유엔 교회 센터에서 한경직 목사에게 이 상을 주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한경직 목사는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한국 기독교의 눈부신 성장을 이끌었다.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인 그는 한국에 많은 교회가 서도록 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해외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선교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여러 교육 기관과 사회봉사 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자로서 또 사회 봉사자로서 사회 복지에 기여하였으며, 나라가 위험할 때는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사회의 갈 길을 제시하였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리더의 자리에 올랐던 한경직 목사는 목회를 성공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목회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 시골에서 교인을 데리고 평생 목회한 그 분이 목회 성공자인지 내가 목회 성공한 사람인지 하늘나라 가봐야 알겠습니다"라고 입버릇 처럼 이야기 했다. 누군가는 그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봤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그가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말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히 겸손했으나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다. 낮아져야 높아지고,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교훈이 얼마나 참인가를 자신의 삶을 통해 분명히 증명했다.
월드비전,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다 비우고도 남겨진 한경직 목사의 위대한 유산!
다큐멘터리 <한경직>은 우리보다 한 세대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러 떠나 일생을 헌신한 목회자의 삶과 사명을 재조명하는 영화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돕는 여러 기관을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영락보린원, 영락모자원, 영락경로원, 영락애니아의 집을 설립했다. 또한, 밥 피어스와 함께 한국전쟁 중에 거리에서 죽어 가는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전문 구호기관인 월드비전을 창설했다. 월드비전은 수십 년에 걸쳐 전 세계의 어린이를 돕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으로 활동지역을 넓혀 갔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개발․구호 활동을 하는 기독교 국제구호개발기구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1980년 후반 한 형제이자 같은 동포이면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살리자는 뜻에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주창하고 나섰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1990년 7월에 남포항을 통해 쌀 1만 가마가 북한 동포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분단 이후 첫 남북 민간 교역의 문을 열었고, 이는 굳게 닫힌 북한의 빗장을 여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한경직 목사는 20개 교단, 26개 기독교 기관과 단체들로 이루어진 협의체인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총재로서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특히, 84선교대회 여의도 집회는 약 100만 명이 집회에 참석해 세계 기독교 역사상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드린 유례없는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교회로 부상하는 데 한경직이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한경직 목사는 시대적 필요를 간파하고 그 시대에 맞는 다양한 사역을 펼쳤다. 또한,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영적 카리스마가 담긴 말씀은 사람들의 필요 가득 채워주었다.
"존경하는 그 분의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다" <한경직> 아름다운 나눔 천사 탤런트 정애리 강력 추천!
드라마 <내 인생의 단비> <그대 없인 못살아>로 바쁜 활동을 이어가며 단아한 이미지로 사랑 받고 있는 탤런트 정애리가 다큐멘터리 <한경직>의 내레이션에 참여했다. 월드비전 친선대사를 비롯해 연탄은행, 생명의 전화, 평화의 마을의 홍보대사뿐 아니라, 북한동포돕기 생명의 이음줄 운동 후원과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연예인 자문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정애리. 그녀는 2002년 행정안전부 선정 밝은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 대통령 표창, 2007년 국제사회봉사의원연맹 사회봉사특별상, 제28회 세종문화상 통일외교부문상, 제3회 대한민국 나눔대상 국회상임워원장상 등을 수상한 나눔 천사다. 이번 내레이션은 평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정애리가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월드비전의 창설자이자 한국사회의 가장 존경받는 기독교 지도자로 평가받는 한경직 목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참여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애리는 “내레이션 제의를 받았을 때 망설임 없이 바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경직 목사님을 알릴 수 있는 의미있는 작품에 참여하게 되어 큰 영광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놀라운 집중력과 베테랑다운 관록으로 내레이션 녹음을 마친 정애리는 “영화 속에 그려지는 한경직 목사님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특히 가슴에 와닿았다. 나의 아버지의 모습과도 많이 닮으신 분이라 가슴이 뜨거웠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려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다큐멘터리 <한경직>은 탤런트 정애리의 차분하고도 따뜻한 목소리가 더해져 영화에 깊은 울림을 더한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첫번째 다큐멘터리! <소명><회복><울지마 톤즈> 종교 다큐 흥행 계보 이어간다!
저예산으로 제작돼 단관 개봉이나 소규모 개봉으로 시작,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수 개월간의 장기상영으로 차곡 차곡 흥행 성적을 쌓아가는 종교 다큐의 저력은 대한민국 극장가에 몇 년 째 이어지고 있는 흥행 선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9년 개봉해 장기 상영으로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종교 다큐의 선두주자가 된 <소명>을 시작으로, 2010년, 15만을 돌파하며 <소명>의 기록을 깬 <회복>, 그리고 2011년 무려 43만이라는 진기록을 낳은 <울지마 톤즈>까지. 이러한 종교 다큐들은 종교적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뛰어 넘어 크리스천들뿐 아니라 대중까지 아우르는 큰 감동으로 그 놀라운 파급효과를 낳을 수 있었다.
2012년의 가을, 종교 다큐 흥행 신화를 이어갈 새로운 작품이 극장가에 작지만 큰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의 전기 다큐멘터리 <한경직>이 바로 그 주인공! 특히, <한경직>은 옥한흠 목사, 김준곤 목사 등 뜨거운 복음의 부흥을 일으켰던 한국 개신교의 1세대 지도자들의 타계 이후를 되돌아 보는 첫 번째 다큐멘터리로 더욱 그 의미를 더한다.
잊고 있던 한경직 목사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는 이야기
한경직 목사는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고난주간인 2000년 4월 19일 오후 1시 15분에 영락교회 안에 있는 사택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빈소에는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 영부인에서부터 이름 없는 평범한 이들까지, 기독교계 지도자뿐 아니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불교 송원주 조계종 전 총무원장까지 많은 이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애도의 물결이 멈추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이 그에게 ‘아름다운 빈손’이라는 별명을 지어 줄 정도로 그는 예수님을 닮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 한 목사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 한 칸, 땅 한 평, 통장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한국 교회사 최고 위치에 계시다 떠나는 분이라기에는 참으로 검소했다. 그분의 마지막 발걸음은 우리가 얼마나 물질의 풍요에 빠져 있는가를 돌아보게 했다. 한 목사를 그리워하는 물결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열 두 해가 지났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종교의 틀까지 벗어나 사회를 아우르던 분이 이제 우리 사회에 안 계시다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잦다. 개개인과 사회가 함께 성숙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 어른의 충고를 듣고 조언을 청하고 싶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한 목사가 몸소 전하던 사랑의 메시지가 다시 필요한 이때, 한 사람의 위대한 삶이 보여주는 교훈을 가슴 속에 깊이 남게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한경직>이 기획되었다. 이번 작품은 추기경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속에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사랑의 힘, 일생 가져야 했던 고민들은 다시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목사님들, 예수님 잘 믿으세요” 믿음의 푯대가 되어 준 진정한 목회자
한경직 목사의 삶은 자신이 설교한대로 행동하는 실천하는 사랑을 보여주며 수많은 목회자들의 믿음의 푯대가 되어주었다. 교계의 원로 중진목사들이 남한산성에 은퇴해있던 한경직 목사의 병문안을 위해 방문하였다가 방문자중 한분이 “모처럼 이렇게 교계의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라고 청하자,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한경직 목사는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는 간곡한 당부 말씀을 해 교계의 원로 중진목사들이 당황하게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목회자로서 그 누가 쉽게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최근까지 한국 사회 내에서 기독교인들이 비판 받는 현실을 보면서 가슴 아픈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잘못한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비판이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일부 크리스천들의 삶이 비 기독인들이 볼 때에 불합리하고 옳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정말 우리 주님께서 쓰시는 의인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림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다.
한경직 목사와 과거를 함께한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목회자의 표본, 행동하는 사랑 그 자체였다. 그는 교회에서 월급을 받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둑으로 가서 생활이 어려워 옷을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교회에서는 그의 아내에게 월급을 전해 줬다. 그는 마지막까지 여름 옷 두 벌, 겨울 옷 두 벌로 생활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와서 값비싸고 좋은 선물을 주고 가면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가난한 신학생들과 교회 직원, 구걸하는 걸인들에게 나눠줬다. 한경직이 템플턴상을 받으러 베를린에 갈 때 입고 갈 변변한 양복이 없자 이를 알게 된 어느 분이 출국 직전에 급하게 양복을 마련해드리기도 했다. 그는 템플턴상과 함께 받은 102만 달러 전부를 북한선교와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에 쓰도록 영락교회에 맡겼다. 목회자는 근검절약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는 남의 집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는 뜻의 ‘한경직 우거처’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지냈다. 심지어 고향을 떠나 월남했던 한경직 목사에게 고향인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직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한 실향민이 많기 때문에 나만 먼저 가지 않겠다”라고 하며 사양했다.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말씀대로 사신 참 사도 그가 더욱 그리워진다.
한 인간의 사회적 성공보다 인간적 진심을 보다
세속적인 사람의 처지에서는 성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부터 고속 승진이 이루어졌으며 목회자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게다가 자신이 하는 말에 사회가 주목하고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 등 누릴 것이 많은 인생이었다고 말이다. 성공한 인생이 언제나 중요한 발자취를 많이 남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목사의 인생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에게, 많은 사건과 장소에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자료화면 속 한경직 목사는 언제나 한국 사회에 대한 걱정과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노인과 고아 같은 약자들을 돌보는 것에 더욱 힘쓸 것을 다짐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큼 행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종종 드러난다. 많은 이들이 한경직 목사를 겸손의 사람, 화합과 화해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에게 있어서 겸손을 신앙의 덕목이었고, 목회를 위한 결단이었다. 손 한번 잡아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에 사람은 때론 행한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는다. 한경직 목사와 인연을 맺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위로와 격려에 큰 힘을 받았던 경험을 고백했다. 은퇴 후 원로 목사의 자리에서도 자신을 찾은 젊은 목사들에게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두 손을 모아 부탁하며, 단 한번도 말을 낮춘적 없다는 한경직 목사. 자리의 대단함보다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빛났던 사람. 이토록 위대한 삶을 살아내고도 자신을 ‘빚진자’라 부르는 겸손한 한경직 목사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따라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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