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시 추운 겨울, 마음을 녹여줄 단 하나의 감동 다큐멘터리
<동백아가씨>는 이 땅의 그 어떤 병보다 무서운 편견과 가혹한 차별 속에서 핍박 받은 한센인, 이행심 할머니의 일흔 일곱 해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주인공 이행심 할머니는 네 살에 한센인 부모를 따라 소록도에 들어와 일제의 강제노역과 배고픔 끝에 결국 열 일곱 꽃다운 나이에 한센병에 걸린 소록도의 산 증인이다. <동백아가씨>는 일제가 재정한 나예방법에 의해 소록도에 강제 격리수용된 한센인들의 역사적 아픔은 물론,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임신과 양육의 자유를 강제로 송두리째 빼앗긴 이행심 할머니의 한 많은 개인사를 생생한 증언을 통해 내밀하게 담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일개 개인사를 넘어 잊혀진 또는 몰랐던 우리의 근.현대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고 더불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금언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힘과 감동이 있다. <동백아가씨>는 우리 유년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들의 자화상이자 이 땅의 모든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시로 추운 겨울, 얼어 붙은 마음을 녹여줄 36.5도의 감동 다큐멘터리이다.
잊고 있던 혹은 몰랐던 우리 역사의 윗목 한 켠 뿌리깊은 편견과 차별이 오롯이 박힌 역사와의 슬픈 조우
1931년 나예방법 제정과 함께 조선의 한센인들을 소록도로 강제 이주시킨 일본군은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약이나 치료를 제공하기 보다는 온갖 강제노역에 동원하기 시작했고,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근거 없는 이유를 들어 무차별하게 자행된 단종수술과 강제낙태를 자행했다. 어떠한 역사책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소록도 곳곳에 아픈 상처로 남아있으며, 카메라는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낸다.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5분이면 갈 수 있는 소록도는 해방 이후에도 그 식민의 잔재가 그대로 드리워져 존재해왔다. 한센인들은 세 번 죽는다고 한다. 한센병에 걸려서 죽고, 감금실에서 죽고, 화장을 당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죽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인다면, '왜곡된 인식으로 인한 정신적 죽음'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한센병은 감기보다도 전염력이 약하고 그 치료 또한 아주 쉽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밝혀진 사실. 그러나 현재도 이 땅의 한센인들은 육체적 질병이 아닌 왜곡된 인식의 질병, 사회적 차별의 질병으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한센병력자, 승차거부나 식당이용 거부 경험 38.3% 발병 이후 자살 생각 81.4% (2006년 1월 보도자료)
박정숙 감독은 소록도의 첫인상을 ‘너무나 가까워서 놀라웠다’고 회고한다. 식민지 30년, 해방 후 60년, 그렇게 90년을 이어져 내려온 아픔의 역사. 소록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가 만들어졌지만,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편견과 차별을 녹이는 희망의 다리라고, 그렇게 소록도와 육지는 마음으로 가까워져야 한다고 <동백아가씨>는 말한다.
일본에서의 ‘소록도 한센인 보상청구소송’ 한국에서의 ‘한센인 특별법’ 개정운동
2001년 일본 구마모토에서 한센인 보상청구 소송이 승소했다. 이 판결은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를 진행했던 일본의 변호사들이 한국과 대만 한센인들의 보상청구를 위해 또다른 소송을 준비하여, 2005년 5월 이행심 할머니를 포함한 소록도 주민들이 증언을 위해 일본 법정에 섰지만 같은 해 10월, 일본 법원은 한국 소록도 한센인들의 소송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 2006년 6월 22일, 이행심 할머니를 포함한 총 66명에 대한 보상이 결정되었다. 또한 4년여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국내에도 2007년 ‘한센인 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이는 아직 실망스러운 수준. 우선 법이 정하는 ‘한센인 피해자’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고, 게다가 이들에게 주어지는 실제적인 의료지원금은 이미 받고 있는 의료혜택의 가치를 뺀 것이기에 매우 미비한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한센인 피해사건’을 추가 지정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을 뿐 아니라, 한센인권연구회의 창립 등 한센인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여러 단위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소중한 생명으로서, 동등한 한 국민으로서 당연히 누려할 인간적인 권리들을 빼앗겨왔던 한센인들의 모든 고난의 세월이 회복되기를 희망하는,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다큐멘터리 <동백아가씨>. 귓가에 아릿하게 남는 할머니의 노랫소리와 함께 올 겨울, 따뜻한 감동과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잊을 수 없던 소록도의 풍경, 임신 중이었던 감독과 이행심 할머니와의 운명적 만남 출산 후까지 이어진 3년에 걸친 기록
2002년 여름, 단순히 여행을 위해 찾았던 소록도는 감독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기게 된다. 아름다운 바다와 나무들에 감탄하기도 잠시, 부스스한 흰머리를 하고 꼬부라진 허리를 구부려 앉아 빨래를 하시던 어느 할머니의 뒷모습이 어쩐지 처연하다 생각될 무렵, 그녀의 손가락 없는 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뭉뚱그려진 손의 충격, 그렇게 접하게 된 소록도의 아픈 역사...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할머니의 작은 뒷모습을 잊을 수 없던 박정숙 감독은 2004년 3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카메라를 든 채 소록도를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소록도에서 짐이 무거우니 차를 태워주겠다던 친절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이행심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그야말로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아직 다큐의 주인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시절, 할머니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참을 울던 박정숙 감독의 마음 속에, 그리고 뱃속에 있던 아이에게, 또 그녀의 부른 배를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시던 이행심 할머니의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흘러갔고 그들은 그렇게 '교감‘하기 시작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갖고 있는 마음, 그 하나만으로도 카메라를 들기엔 충분했다.
할머니의 역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록도, 한센인 전체의 역사로 확대되어 갔고 ‘여태껏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고 느낀 감독의 끈질긴 촬영은 아이를 낳은 후까지 계속되었다.
숨어사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 할머니와 소록도 식구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할머니와 감독이 마음으로 공감했다고 해서 촬영이 일사천리로 쉽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할머니, 그리고 소록도 주민들은 자신들을 촬영하는 카메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 촬영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소록도와 주민들의 역사가 세상에 알려져야 하는 이유를 설득 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환영 받지 못하는 감독, 그녀의 호칭은 “애기엄마~”
서울에서 소록도는 꽤나 먼 거리지만, 만삭의 몸을 한 감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부지런히 서울과 소록도를 오갔다. 촬영도 촬영이었지만 어느새 가족처럼 정이 들어버린 할머니와의 만남이 소중하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임신 7개월에 이루어진 만남은 그 아이를 낳은 후로까지 이어졌고 박정숙 감독의 출산은 소록도 안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이자 동시에 신나는 잔치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이제 아이도 낳았겠다, 더욱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고자 다짐을 한 감독을 소록도 할머니들이 타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은 애를 키우는 것”이라며, “혼자 있을 아이가 얼마나 엄마를 찾겠냐”며 아이를 두고 홀로 소록도를 찾은 감독을 서울로 쫓아보내려까지 하셨던 것. 할머니들의 그런 반응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 뒤에 자리한 그녀들의 아이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알기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던 감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코 끝이 시큰해지는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고. 덧붙여, ‘감독’이 뭐하는 사람인지, ‘카메라’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보다 그저 ‘임신한 여자’로 기억되던 박정숙 감독의 섬 안에서의 호칭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욱 ‘애기엄마~’라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