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보다 화려한 춤, 사랑보다 깊은 음악… “나만이 왕을 춤추게 할 수 있어”
17세기 프랑스. 열 네 살의 어린 왕 ‘루이 14세’ (브누아 마지멜 분)는 이태리 출신 음악가 ‘륄리’ (보리스 테랄 분)가 만든 무곡에 맞춰 춤을 춘다. 어린 루이 대신에 실질적인 권력을 움켜쥔 사람은 어머니와 재상 ‘마자랭’. 루이에게 주어진 건 춤과 음악 뿐이다.
그리고 8년 후, 루이는 재상의 죽음을 계기로 직접 통치에 나선다. 루이는 자신을 위해 작곡하고 자신의 춤을 돋보이게 해주는 륄리의 음악에 매료된다. 륄리 또한 혼신을 다해 작곡한 음악과 열렬한 사랑을 왕에게 바친다. 그들은 마치 춤과 음악에 심취하듯 서로에게 빠져들어간 것이다.
루이는 왕실극단의 연출자 ‘몰리에르’ (체키 카리요 분)와 왕실 악단 지휘자 ‘륄리’가 만든 음악과 연극을 통해 절대권력의 태양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들의 작품은 바로 왕의 권력과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러한 왕의 은밀한 야심을 대변하던 몰리에르와 륄리는 지나치게 신랄한 풍자극으로 귀족과 성직자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하지만 루이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마는데… 여린 소년에서 절대 군주로…
어린 루이, 상처 받은 고독한 영혼 1643년, 루이 13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은 겨우 5살이었다. 그때부터 약 20년간 프랑스는 스페인 여인 안느 도트리슈(섭정모후)와 이태리출신 재상 마자랭에 의해 통치된다. 이 시기, 점점 강화되는 왕권을 견제하던 대지주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고자 프롱드의 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재상 마자랭과 귀족, 의회의원, 상인, 성직자, 인민 등이 분열되어 당파싸움을 한 덕분에 어린 루이의 왕권은 오히려 강화된다. 프롱드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한밤 중 도피, 귀족들에의 불신 등은 루이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이로 인해 그를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고독한 군주로 성장하게 만든 것이다.
모정과 권력 사이에 서서… 루이 14세 왕정 초기는 엄격한 신앙심(카톨릭)과 도덕성의 시대였다. 권력을 손에 쥐고자 했던 세력들은 왕과 종교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했다. 루이 14세의 섭정모후인 안느 도트리슈는 그들 편에 서 주었고 기댈 곳 없는 어린 루이는 그 모든 상황에 홀로 맞서야 했다. 때문에 루이는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모후와 대립하곤 했다.
왕과 두 남자, 절대 권력의 아름다운 파워게임
미디어를 대신했던 춤과 권력 “ 춤을 춘다는 것은 자신의 팔다리와 몸을 이용해 최고의 은총과 조화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궁정 발레’는 100년 이상이나 왕의 측근들이 가장 즐기는 활동이었고 각종 의상, 장식, 기계장치가 총동원된 진정한 의미의 스펙타클이었다. “
루이 14세는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춤추기에 몰두했다. 춤은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궁정 발레’를 ‘왕의 발레’로 변형시켜 루이 14세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루이 14세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잡을 수 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미디어의 역할을 당시에는 발레가 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왕이 곧 국가였으며 따라서 ‘왕의 신체’는 곧 국가 전체와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발레의 발달사는 곧 왕이 장악하고자 한 사회와 권력의 발전 또는 전이라는 엄청난 의미를 가진 상징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륄리는 왕이 변신할 때마다 왕이 ‘스스로에게 바라는 바’와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에 대해 바라는 바’, 오늘날로 치자면 ‘언론이나 대중의 눈에 비춰지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내곤 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걸친 륄리의 작품세계의 발전은 곧 왕이 자신의 국가와 백성들, 즉 세상에 대해 보여주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갔는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음악과 연극, 그리고 정치 극작가로서 몰리에르는 자신의 희극 작품에 륄리의 음악과 안무를 삽입하도록 하면서 륄리의 예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지된 동작의 연속인 발레와 연극이 결합되는 과정을 습득하며 륄리는 시공간의 역학을 이해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둘의 작업이 거듭될수록 륄리는 자신의 음악이 몰리에르의 작품을 시중을 든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독선적인 륄리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고 둘의 결별을 촉발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하게는 륄리의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 14세와 륄리, 그리고 몰리에르, 예술을 축으로 했던 이 세 사람의 힘의 역학관계는 한시대를 지배할만큼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왕의 실리적 선택과 그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는 예술가의 말로는 권력의 냉혹한 속성을 실감케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예술적 교감, 혹은 매혹적 동성애...
권력자와 예술가들의 성적 편력에 대한 논의는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다 미술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20세기 최고 독재자인 히틀러만 해도 20대 청년 시절부터 놀라운 동성애 편력을 보여왔음이 최근 밝혀졌고, 랭보 , 오스카 와일드, 버지니아 울프 등도 공식, 비공식적으로 양성애, 또는 동성애 성향의 예술가들이었다는 후일담들이 전해지고 있다.
권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춤과 음악과 문학으로 한데 어우러졌던 루이 14세와 륄리, 몰리에르… 이 영화에서 예술을 향한 그들의 사랑, 뜨거운 감성은 서로의 관계를 예술적 동반자 이상의 것으로 묘사한다. 사실 감독은 직접적으로 루이 14세와 륄리의 연애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전략적으로 서로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그들의 관계를 암시함으로서 관객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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