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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언노운 우먼
jimmani 2009-07-27 오후 12:16:44 1041   [1]

 

거장의 손길을 느낀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되어버린 요즘이지만, 가끔씩 오아시스처럼 등장하는 거장의 창작물을 접할 때면, 그 전엔 '기대도 되지만 한편으론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경솔한 생각이 들다가도 접한 후엔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거장의 내공에 탄복하게 될 때가 많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영화 작업에 삶을 바쳐 온 장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고 있노라면, 우등생의 능수능란한 테크닉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가슴 먹먹해지는 깊이에 감동하게 된다. 머리를 굴려봤을 때 이 영화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가슴으로 되짚어봤을 때 이 영화 정말 멋지다고 느끼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오랜만에 내놓은 신작(이라지만 사실은 2006년작이다) <언노운 우먼>은 이러한 감동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에게 명성을 안겨다 준 20년 전의 <시네마 천국> 이후로는 그보다 더 뛰어난 업적이 보이지 않는 듯 했던 예전의 거장의 그것도 나온지 3년이나 지난 작품이 왜 굳이 개봉을 하는 걸까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생각은 굉장히 경솔하고 무례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3년만에 우리나라에서 빛을 보게 된 이 영화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관객의 가슴을 뒤흔드는 거장의 힘이란 이런 것임을 보란듯이 증명해 보인다.

 

행동행동 하나하나 뭔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한 여인 이레나(크세니야 라포포트)는 젊고 부유한 보석 세공사 집안인 아다처 일가에 유독 관심을 갖는다. 그 집의 가정부인 지나와 친분을 쌓은 이레나는 아다처 일가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수집해 나가고, 급기야 사고로 위장해 지나를 해치고 가정부 자리를 꿰차기에 이른다. 요리와 청소는 물론이요 모르는 운전도 손수 배울 만큼 성실하고 상냥한 태도로 아다처 부부의 신임을 얻어가는 이레나는 이 집의 딸인 테아와도 정을 쌓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다처 부부가 집을 비우고 테아와 단둘이 있을 때면 이레나는 테아를 거의 학대하는 수준으로 넘어뜨렸다 일으키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테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레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런데 이런 이레나의 뒤를 쫓는 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이레나의 처지는 다시금 위태로워진다. 과연 그녀의 과거가 어떻기에, 아다처 집안이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레나를 둘러싸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로 들어가기 이전에 영화는 상당히 충격적인 요소들로 채워진 겉모습을 하고 있다. 오프닝부터 등장하는 젊은 여성들의 전신 누드 장면이나 그 장면을 두고 심사하듯 오가는 남자들의 대화는 이레나의 과거가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암시한다. 거기에 이레나가 겪는 일들마다 따라나오는 짤막짤막한 플래시백들은 그녀에게 가해지는 심각한 성적 학대들이 빠른 편집으로 보여지면서 평탄하지 않은 수준을 넘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과거였을 것이라는 예상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길지 않고 짧은 스타카토식의 편집은 이레나가 당한 성적 학대의 이미지를 더 비참하게 형상화시킨다. 이런 처참한 과거를 겪은 이레나는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려 애를 쓰는데, 이런 이레나의 행적을 따라가는 데 충실하다는 점에서 이레나는 이 영화의 중추나 다름없다. 이런 중추적 역할을 해낸 러시아 출신의 배우 크세니아 라포포트의 연기는 실로 놀라울 정도다. 보기에도 상당히 불쾌한 성적 학대 장면도 몸을 사리지 않고 소화해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비참함과 현실의 절실함, 냉정함을 오가는 연기 변신은 만만치 않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온전히 장악할 만한 힘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 또 한 명의 중요한 배우를 꼽는다면 음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이는 주세페 토르나토레와 수 차례 호흡을 맞춰 온 말이 필요없는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다. 만들어내는 음악마다 감성을 지극하게 저미는 감동을 자아내는 그의 능력은 이 영화에서도 전혀 녹슬지 않았다. 때론 신경을 몹시 긁는 현악기의 울림으로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자아내다가도 영화 전체적으로는 여인의 불안한 심리와 미래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모두 담긴 듯한 절절한 사운드가 울려퍼지며 관객의 가슴을 뒤흔든다. 영화가 자아내는 감성이 관객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이 대단한 영화음악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처럼 영화는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영화 전체를 뒤덮는 선율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서로 상당히 맞지 않는 조화인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결코 스릴러만으로 끝나지 않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이면서도 가슴을 치게 만드는 비통한 드라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스릴러로서의 만듦새가 부실한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은 뭘 만들어도 잘 만드는구나 싶을 만큼 스릴러의 감각이 날카롭게 서 있다. 영화는 분명 심상치 않은 과거를 갖고 있을 여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지만 그녀의 과거를 끝까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가 현재 상황에서 언뜻언뜻 떠올리는 기억처럼 과거 또한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릴 뿐이다. 얼핏 봐도 꽤나 유쾌하지 못한 이미지이기에 그 비극성을 능히 짐작하게 하면서도 호기심 또한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대단히 영악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의문만 남긴 채 이레나의 과거와 현재를 띄엄띄엄 오가다가 그 사이를 연결하는 한 남자가 등장하고, 그로 인해 증폭되는 인물들 간의 의심과 궁금증이 더해가면서 영화의 서스펜스는 갈수록 극대화되어 간다. 이처럼 이 영화가 본연의 메시지를 꺼내들기 전까지 보여주는 스릴러 장르의 영화로서의 흐름은 꽤 착실하고 알차게 짜여 있다.

 

 

이렇게 스릴러의 구조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잔뜩 일으킨 다음에 영화는 서서히 원래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꺼내들기 시작한다. 자칫 과거가 워낙에 비극적이고 그로 인해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이레나의 몸부림 또한 절실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신파조로 빠질 수도 있지만, 영화는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와 터질 듯 말 듯 절제하는 감독의 감정 통제력, 그리고 고품격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음악이 어우러져 수준 높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이른다. 때문에 이 여인의 비밀이 그리도 비참한 것이라 한들, 우리는 이 사연으로부터 통속 드라마같은 진부한 감동이 아니라 삶의 의미까지 가늠해 보게 하는 진실된 감동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감독은 전작들로부터 꾸준히 보여줘 왔던 인간애의 시선을 이 영화에서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이전 영화의 등장인물들보다 훨씬 거친 삶을 살았기에 그러한 인간애의 시선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미래에 대한 강렬한 집착 때문에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냉혈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당연히 갖고 있을 간절한 욕망은 그녀를 지독한 팜므파탈이라기보다 손 내밀어 일으켜주고 싶은 여인으로 만든다. 이로써 영화는 한 여인의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통속 드라마이기 이전에,인간으로서의 삶 혹은 여자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돌이켜보게 하는 진지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러한 메시지는 이레나 한 사람만 부각되는 게 아니라 그녀와 소녀 테아가 쌓는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통해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레나는 과거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여자 또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테아에게만은 물려주려 부단히 노력한다. 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짐승처럼 취급받고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삶이 아니라 불의 앞에선 당당히 맞설 줄 알고 내가 맞으면 상대방을 때려줄 줄도 아는 주체적인 삶 말이다. 간간이 보여지는 집안에서의 테아 학대(?) 장면도 한편으론 이를 위한 모질지만 애정어린 이레나의 훈련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뼈아픈 이레나의 과거는 그녀를 때론 그릇된 행동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이레나는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픈 마음으로 테아에게 그러한 아픈 과거를 오히려 절절한 애정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애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의지해야 할 필요성이 늘어나면서 여자 대 여자로서의 깊은 유대관계로 발전한다. '여자가 되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나에게 말해줘야 해'하고 테아에게 속삭이는 이레나의 모습은 이들의 관계가 더 이상 일방적인 사랑만이 오가는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멋진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여느 통속 드라마라면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통해 관객의 눈물을 잔뜩 이끌어내다가 밑도 끝도 없이 좌절만이 존재하는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비극적 감정만 유지하려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가 끝나가는 순간까지도 사실 이레나의 비참한 과거는 명백해 보이고, 그로 인해 얼룩진 현재의 상처 또한 분명해 보이지만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참한 삶 속에서 그녀가 맺을 수 있었던 보석같은 인간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영화는 '나 같은 사람도 미래가 있다고 믿었던 게 가장 큰 실수였다'는 이레나의 말이 실수였음을 은근슬쩍 내비친다. 비록 지난 과거 때문에 독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녀지만, 한편으로 그녀가 일궈낸 이 눈부신 우정은 용서받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언노운 우먼>은 결말이 빤히 보일 듯한 통속적 스릴러 드라마의 구조에서 그 수준을 뛰어넘는 감동적인 인간애와 우정,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는 영화다. 스릴러의 문법을 충실히 따라가며 관객에게 만만치 않은 서스펜스를 주다가도 결말에 가서 만나는 건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라기보다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을 진한 여운이다. 혐오스러웠던 과거를 지워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던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가보면, 그 뒤에 그녀가 나이를 한참 먹고서야 발견했을 삶을 향한 식지 않은 희망을 우리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사실상 진짜 신작은 올 베니스 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공개되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바리아 - 라 뽀르타 델 벤토>다.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


(총 1명 참여)
zoophi
저도 보고싶네요   
2010-01-23 02:07
kyi1978
ㄳ   
2009-11-10 15:19
snc1228y
와우~~ 영화를 본듯하네요.감사..   
2009-07-27 12:40
veira
어허허- 좋군요   
2009-07-2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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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우먼(2006, The Unknown Woman / La Sconosciu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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