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의 여정에서 배운 연대의 정신... ★★★★☆ 다르덴 형제의 영화적 특징을 한 번 꼽아보죠. 형식적으로 보면 한 인물만을 따라다니는 핸드헬드의 리듬감, 어떤 배경음악도 넣지 않는 현실감 내지 건조함, 비전문배우의 기용 등일 것 같구요, 내용적으로 보면 냉혹한 현실에 던져진 인물(민중)의 힘겨운 분투기가 아닐까 싶네요. 주요 인물들이 윤리적이거나 정치적 딜레마의 상황에 빠진다는 것이나 인물과 상황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도 꼽을 수 있을 것 같구요. 지금은 좀 뜸해졌지만, 한 때 한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독립영화에 핸드헬드 촬영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들 다르덴 형제의 영향이라고 얘기들을 했죠. 아무튼 이런 점에서 보면 <내일을 위한 시간>은 전형적인 다르덴 형제 영화입니다. 물론 마리옹 꼬띠아르라는 스타급 배우를 출연시킨 첫 다르덴 형제 영화이기도 하구요.(전작 <자전거 탄 소년>에선 처음으로 배경음악을 삽입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미리 시놉시스를 읽고 보지 않는다면 <내일을 위한 시간>은 영화가 한 동안 흘러가도록 구체적인 상황을 알기 힘들다는 점도 역시 그러합니다. 다르덴 형제는 왜 자신들의 영화에 처음으로 유명 스타급 배우를 출연시켰을까요? 인터뷰에 보면 지금까지 다르덴 형제 영화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추락할 곳 없는 기층민중이었습니다. 집도 없이 컨테이너에 살거나 불법 이민자거나 보호자 없는 어린 아이처럼요. 그런 민중을 유명배우가 연기하게 되면 관객들이 이질감을 느끼거나 판타지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어 비전문배우를 기용해 왔는데, <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인공은 나름 차와 집이 있는 평범한 이웃이므로 유명배우를 기용해도 무리 없겠다는 판단이었다고 합니다. 즉 <내일을 위한 시간>은 평범한 이웃, 중산층의 몰락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산층이 몰락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현재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산드라는 어떤 이유에선지 회사를 한 동안 쉬었고, 이제 복직하려 합니다. 그런데 사장과 반장은 나머지 직원들에게 산드라의 복직과 1,000유로의 보너스 중 하나를 선택하는 투표를 하게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보너스를 택합니다. 산드라는 절망하죠. 그런데 투표 과정에서 반장의 개입으로 공정하지 않았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월요일에 다시 투표하기로 합니다. 산드라는 이제 주말 이틀 동안 16명의 동료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복직을 위해 투표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한 여정에 나서게 됩니다. 이야기는 아무런 꾸밈이 없이 단순하며 반복적입니다. 그저 이틀 동안 동료들을 만나고 전화로 통화하면서 동일한 내용으로 호소를 하는 산드라를 따라갈 뿐이죠. 동료들을 설득해야 하는 산드라에게나 산드라의 얼굴을 봐야하는 동료들에게나 이는 엄청난 고통과 번민을 안겨주는 여정입니다. 산드라는 자신의 부탁이 동료들에게는 폭력적 행위이고 자신에게는 비굴함을 안겨줄 뿐이라며 포기하려 하지만, 남편의 월급만으로 집세를 내기 힘든 현실에서 복직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임대주택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동료들 역시 한 명 한 명 보너스 1,000유로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입니다. 누구는 과거에 산드라로부터 받은 도움을 기억하고 기꺼이 산드라에게 투표하기로 하지만, 가장 친했던 동료는 전화조차 피하고, 또 심지어 폭력적으로 나오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주말임에도 누구 한 명 편안하게 즐기는 동료가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고단한 현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황은 반복적이지만, 이런 다양한 반응으로 인해 영화는 계속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동료들의 반응에 대한 절묘한 설계는 산드라에게나 관객에게나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을 주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집니다. 반장이 일부 계약직원들에게 ‘산드라가 복직하게 되면 누군가 다른 직원이 그만둘 수 있다’는 얘기를 했고, 계약직원들에게 이는 곧 자신의 재계약이 힘들 수 있다는 협박으로 받아들이게 된 거죠. 다른 정규직원들도 마찬가집니다. 사실 산드라나 동료들이나 산드라의 문제가 산드라에게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겁을 먹고 있는 거죠.(<카트>를 떠올려보세요) 다르덴 형제는 산드라와 동료들과의 대화과정 곳곳에 이것이 단지 산드라와 동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직원들에게 동료의 복직과 보너스를 강제한 것은 산드라도 아니고 동료도 아닌, 자본이라는 사실 그 자체라는 거죠. 자본은, 시스템은 자신들은 뒤로 숨은 채 피해자, 피억압자들끼리의 싸움으로 몰고 갑니다. 도대체 어떻게 결말이 날지 궁금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이리저리 고민을 해봐도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될지에 대해 별다른 해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 투표하는 장면에서 막을 내리며 결론을 보여주지 않는다(소위 열린 결말)는 정도는 너무 쉬울 뿐만 아니라, 그런 식의 결론을 다르덴 형제는 별로 선호하지 않을 거 같았구요. 다르덴 형제가 내린 결론은 그야말로 존엄과 위엄 있는 연대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개인과의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자본과 시스템의 음모를 산드라는 단칼에 거부하고 고결함을 잃지 않은 존재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고는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힘겹게 휘청휘청 걷던 발걸음이 아니라 단단해진 모습으로 멀리 힘차게 걸어 나아갑니다. ※ 왜 같은 핸드헬드 촬영인데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왜 다르게 느껴질까? 예전에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떤 잡지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보니, 다르덴 형제는 영화를 찍기 전에 몇 개월 동안 수차례 리허설을 거쳐 최적의 동선과 리듬감을 찾아낸 후 실제 촬영에 들어간다고 하는군요. 역시 그런 리듬감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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