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 ★★★★☆
※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결말 등 주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정리가 가능할 정도로 단순하다. 중력과 산소가 없는 지구 위 우주 공간에서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던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치면서 탑승했던 우주 왕복선이 파괴되어 드넓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다.
우선 거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블록버스터에 사실상 두 명의 배우(산드라 블록, 조지 클루니)만이 출연하고 아무 것도 없는 우주공간에서 외계인도 악당도 없는 이야기의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체에 대해 쿠아론 알폰소 감독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다. 기사에 의하면 워너브라더스 측은 끊임없이 각본 수정 - 외계인이든 뭐든 악당이 나오도록 - 을 요청했으나 끝내 감독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워너브라더스의 요청이 받아 들여졌다면 우린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그저 그런 액션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목이 <중력>인 영화는 아이러니하게 영화의 99.9%를 중력이 없는 우주공간에서 펼쳐나간다. 도입부를 보자. 시시껄렁한 농담을 계속 던지는 매트(조지 클루니)와 이에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스톤 박사의 작업 과정이 길게 이어진다. 딱히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장면이지만, 영화의 주제/결론을 고려해보면 사실상 그 어떤 장면보다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 인공위성을 폭파했다는 얘기가 들리고, 잠시 뒤 그 잔해가 이들을 덮친다. 무려 20여 분에 이르는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도입부부터 보는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황홀한 우주와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스톤 박사의 헬멧 앵글을 통과해 물이 흐르듯 흘러나간다. 경이로운 순간들의 연속.
망망대해도 아닌, 우주공간에 홀로 남겨진 스톤 박사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묘하다. 끝도 없는 우주에 홀로 남겨졌지만, 오히려 좁은 공간에 갇혀버린 느낌이다. 그런데 <그래비티>는 영화 속 인물의 느낌을 관객도 같이 느끼게 함으로서 주인공의 고독과 외로움에 동참하도록 만든다. 스톤박사가 산소가 부족해 힘들어 할 때, 보는 관객의 숨도 가빠지고, 허공을 헤매며 절망에 빠질 때 관객의 심장박동수도 덩달아 상승해 간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내 몸은 마치 힘든 노동이라도 한 듯 근육이 욱신거리고 정신이 혼미하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는지.
영화는 스톤 박사에게 선택의 순간을 던져준다. 버튼 하나면 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용기를 내어 산다는 것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스톤 박사에겐 왜 살아야 하는지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이유가 없다. 아니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우린 이미 스톤과 매트의 대화를 통해 스톤의 과거에 크나 큰 아픔이 있었고, 이후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한 채 절망 속에서 지내왔음을 알고 있다. 그러한 스톤에겐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과 죽는 것이 등가의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 스톤 박사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그 결과가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다. 대체 스톤 박사를 움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건 대단한 목적의식 때문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사소한 얘기들을 나누고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그것이 살아가는 의미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매트의 시시껄렁한 농담의 결말이 궁금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깐 거대한 우주공간을 다룬 영화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게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는 영화라고? 이거 너무 뻔하고 평범한 얘기 아니냐고? 맞다. 쉬운 얘기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매우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는 얘기이기도 하며, 아무리 쉬운 얘기라도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래비티>는 어쩌면 단순하고 평범할 수 있는 주제를 거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관객에게 우아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 사실상 단 두 명의 배우만이 출연하므로 배우들의 연기가 관건인 영화다. 훌륭하다.
※ 영상과 음향이 중요한 영화이므로 가급적 큰 스크린과 음향 시설이 좋은 극장에서 관람하는 게 좋다.
※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 느낌이 현장감이라면 <그래비티>의 롱테이크는 유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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