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
이란계 프랑스 기자(제임스 카비젤)는 차를 고치기 위해 한 시골마을에 들렀다가 자흐라(쇼레 아그라쉬루)로부터 마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아이를 키우며 열심히 살아가던 소라야(모잔 마르노)가 14살의 어린 신부와 결혼하기 위해 남편 알리(나비드 네가반)가 꾸민 모략에 빠져, 스토닝, 즉 투석형을 당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더 스토닝>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에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게 얼마 전이었다고 얘기되고 있으니, 아마 1980년 초반 정도일 것이다.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 혁명이 1979년 2월 11일) 이라크처럼 반미 독재국가가 일시적으로 존재하기는 해도, 대게 중동국가는 친미 독재국가이거나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독재국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차피 민중들에겐 호랑이거나 사자거나. 이란의 경우만 놓고 봐도 팔레비 왕조에 저항하던 많은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세력이 혁명 성공 이후 오히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투옥되고 쫓겨난 그 암울한 과거.
영화는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 등장한 호메이니 이슬람 정권 하에서 더욱 악화된 인권 상황의 일단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금지시켰지만, 지방의 한적한 마을을 중심으로 이어져 오는 스토닝, 투석형의 악습. 이 모든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자흐라는 과거엔 비슷한 일이 발생해도 기껏 벌금 정도 물었다며, 소라야를 안심시키지만, 지금은 과거가 아니다.
사실 영화는 실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끔찍한 내용에 비해 조금은 평이한 연출과 전형적 캐릭터로 인해 영화적 재미가 반감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후반부,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 이르러 어쩌면 이런 평이한 연출이 이 장면에서의 감정적 분출을 위해 의도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조용하고 느린 진행은 바로 폭풍전야의 상황.
영화는 투석형을 눈뜨고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자세하면서도 천천히, 잔인함을 느끼도록 보여준다. 그 동안 이 영화가 견지해왔던 태도와는 정반대의 느낌. 두 가지 이유. 하나는 피해자가 겪는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보라는 태도, 또 하나는 이게 바로 니들이 하고 있는 잔인한 짓이라는 경고. 이쯤에 와서 떠오르는 건, 실제 돌만 던진다고 투석형인가라는 의문이다. 이란의 시골에서 여전히 몰래 투석형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현실의 대한민국에선 공공연하게 인터넷 투석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의 자각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 잘못되고 어긋난 반응 두 가지를 대표적으로 거론해 보자. 첫 번째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러기에 남편이 원하는 걸 들어줬으면 이렇게까지 끔찍한 결말이 오진 않았겠지라며 마치 소라야의 원칙적인 행동이 사태의 원인인 것처럼 호도하려는 반응이다. 어디서 많이 봤다. 우리에겐 바로 얼마 전 타블로의 학력 문제가 일단락되자, ‘처음부터 타블로가 신속히 대응했으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지진 않았을 것’이라며 타블로의 잘못된 대응을 마치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호도한 과거가 있다. 최민수의 노인 폭행 사태에 대해서도 훗날 무혐의 판결을 받았음에도 최민수의 평소 행동이 문제라는 등 사태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려는 시도는 꾸준히 계속된다. 이런 반응이 잘못된 것이라는 건, 바로 소라야나 타블로, 최민수에게 가해지는 공포가 원하는 게, 알아서 기라는 굴복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실제로 간음을 한 것도 아닌데, 너무 심하다는 반응. 그렇다면 실제로 간음했다고 하면 저런 투석형이 허용될 수 있다는 얘기인가? 인터넷에서 ‘○○녀’ 신상털기 등이 행해질 때, 마녀사냥하지 말라고 하면, ‘마녀가 아닌데 사낭하면 마녀사냥이지만, 실제 마녀이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반론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실제 마녀라고 해도 그것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격을 우리들이 갖고 있지도 않으며, 우리에게 누가 준 것도 아니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벌은 사회적으로 합당한 수준의 벌이어야 한다. 간통에 투석형은 그것을 결정한 마을의 시장과 사제가 보기에도 상식적이지 않은 과도한 형벌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외부에 이 사실을 알려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돌을 던졌지만, 잘못된 정보에 의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돌을 던진 것이므로 자신에게 책임은 없다고 발뺌하는 경우도 흔히 보는 풍경이다. 바로 영화 속 시장처럼. 마지막에 그는 투석형에 처해진 소라야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임을 알고 화를 내지만, 범죄에 가담한 그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스스로도 이런 잘못을 시시때때로 범한다. 문제는 최소한 자신의 잘못이 있음을 부정하지 말라는 얘기다.
“위선자처럼 행동치 말라. 코란을 큰 소리로 인용하면 마치 죄가 가려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 영화를 보면 여성을 과보호하는 사회가 오히려 여성인권이 최악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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