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 ★★★★
1942년 7월 16일 파리 마레지구 생통쥬가 36번지 3층. 유대인 가족 스타르진스키 일가가 살고 있는 곳에 나치에 협력하는 프랑스 경찰이 들이닥친다. 본능적으로 동생 미셸을 보호하기 위해 벽장에 감추고 열쇠를 챙긴 사라로 인해 미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만 수용소로 향하게 된다. 부모님과 헤어져 아이들만 따로 모인 수용소에 수감된 사라의 머릿속은 오직 동생 생각 뿐. 사라는 끝내 동생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과연 사라는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제 2009년 프랑스 파리.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파리에 살고 있는 저널리스트 줄리아(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1942년 파리에서 있었던 유대인 집단 체포 사건을 취재해 나가던 중 시부모님이 소유하고 곧 자신과 남편이 살게 될 생통쥬 아파트에 2차 대전 당시 사라 스타르진스키라는 유대인 소녀가 살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고 소녀의 행방을 좇기 시작한다.
영화 <사라의 열쇠>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병렬로 연결해 끊임없이 오고 간다. 사라의 일생을 보여주는 과거는 플래시백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결론을 고려하면 그건 결국 누군가의 기억을 소환한 것이다. 누구의 기억일까? 물론 영화는 사라를 알고 있었던 누군가의 기억, 가장 핵심적으로는 사라가 직접 남긴 일기를 통한 기억의 소환이겠지만, 사라의 일생은 프랑스의 아픈 과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2차 대전을 피해자로서 또는 가해자로서 거쳐 온 집단으로서 프랑스의 기억이고 이의 소환일 것이다.
<사라의 일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고 공개하며, 거기에서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는 줄리아라는 인물이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자신 또는 조상들의 과오(비록 의도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에 대해 이들이 보여주는 건 주저함, 망설임, 회피에 가깝다. 남편은 사라의 행적을 좇는 줄리아에게 ‘도대체 진실을 알아서 어떻게 할 것이냐’며 힐난하고, 아이를 낙태할 것을 종용한다.(결국 아이는 화해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남편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진실의 탐구를 통한 화해보다는 묻어두고 회피하겠다는 의미) 시아버지는 사라의 진실이 담겨 있는 아버지가 남긴 서류의 확인을 미루고, 미국에 살고 있는 사라의 남편 역시 아들에게 사라가 남긴 자료를 뒤늦게 넘긴다.
이처럼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자들은 모두 침묵하거나 망설이거나 회피하고 있는 가운데, 제3자, 외부인이 진실을 찾아 나서고 역사와 화해하게 되는 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스스로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의 반응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니면 프랑스가 실제로 그러했다는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진실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거나 괴로워는 해도 최소한 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에 정복됐던 프랑스, 그러니깐 피해자로서의 프랑스에게 가해자로서의 고백이나 사죄를 바라는 것이 너무 무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또는 나치의 앞잡이로 학살에 참여한 프랑스인이 있었겠지만, 많은 프랑스인들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든가 소극적 저항을 펼쳤었노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유대인을 체포하고 학살에 참여한 것은 프랑스 국가체제가 수행한 것으로 국가적인 고백과 사죄가 필요함을 드골(아마도)의 연설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해 줄리아와 함께 일하는 젊은 동료의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처음 줄리아가 파리에서 일어났던 유대인 체포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쓸 것이라는 계획을 얘기하다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고 하자, 그 젊은 동료는 “독일 애들이 자료는 잘 정리해 놓는데 왜 자료가 없죠?”라고 의문을 던진다. 이 때 편집국장의 한 마디. “이봐. 이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 얘기라고” 두 번째, 기사가 작성된 후 줄리아는 젊은 동료들에게 묻는다. ‘만약 저 당시에 있었다면 무엇을 했을까’ 젊은 동료는 “아마 TV나 보며 시간을 보냈겠죠”. 역사적 무지와 현실에 대한 무관심. 이를 자양분으로 참혹한 역사, 학살의 역사는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영화는 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의 열쇠>는 누군가의 개인사에 그 사회의 역사가 등재되어 있음을 예의 바르면서도 정중하게 전달한다. 대단히 민감하고 선정적 소재일 수도 있는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도, 단 한 번도 흥분이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도, 어두웠던 과거의 아픔을 잘 전달할 수 있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그 아픔과 슬픔은 영화가 끝나면서 동시에 마감되는 말초적 감정이 아니라 내상처럼 저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만약 나의 할아버지가 친일파의 앞잡이로서 독립군을 고발하고 죽이는 데 앞장선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로 인해 현재의 내가 누리는 부가 가능했음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일제에 저항한 독립군의 재산을 우연찮게 획득해 잘 살고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 사라가 집으로 돌아가 벽장문을 여는 순간부터 영화 후반부는 루즈해지고 인물들의 전형성이 두드러진다. 마치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출이 다른 사람에 의해 된 것처럼 이질적이다.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
※ 영화를 보면서 최소한 두 차례 정도는 울컥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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