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위한 묵직한 질문... ★★★★
2011년 미국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인 어 베러 월드>는 제목에 전제가 하나 들어 있다. 그건 바로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그러니깐 영화는 공동체에 가해지는 또는 공동체 내부의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고 폭력을 어떻게 통제하는 것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를 위해 수잔 비에르 감독은 덴마크와 아프리카를 오가며 일상적으로 가해질 수 있는 몇 가지의 폭력을 관객 앞에 펼쳐 보인다.
아프리카 난민을 상대로 의료 봉사 활동을 하는 안톤(미카엘 페르스브란트)에게는 별거 중인 아내와 10살된 아들 엘리아스가 있다.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 심약한 엘리아스는 학교에서 덩치 큰 아이들에게 상습적인 괴롭힘과 폭력을 당하고 그럼에도 하소연할 곳을 찾지 못한다. 한편, 얼마 전 엄마가 암으로 사망한 크리스티안(윌리엄 요크 닐센)이 엘리아스의 학교로 전학을 온다. 크리스티안은 아이들에게 당하는 엘리아스를 도와주려다 자신이 당하자, 이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되갚아 주며, 이를 계기로 둘은 단짝친구가 된다. 앞서 말한, 수잔 비에르 감독이 제시한 폭력 중 가장 일상적인 폭력이 바로 엘리아스가 학교에서 당하는 따돌림과 괴롭힘이다. 크리스티안은 이러한 일상적 폭력을 폭력으로서 극복하려 하고 이는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의 폭력은 어른인 안톤이 아이들 앞에서 당하는 폭력이다.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이 다른 아이와 시비가 붙자 이를 말리던 안톤은 다른 아이의 아버지에게 모욕적으로 뺨을 맞는다. 끝까지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안톤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힘없는 무능력으로 비춰지고, 크리스티안은 엘리아스에게 복수를 부추긴다. 아이들의 복수는 결국 끔찍한 파국을 불러 온다. 마지막으로 안톤이 일하는 아프리카의 구호소 주위에선 심심풀이 내기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는 무자비한 놈들이 존재한다. 어느 날 이 조직의 두목이 다리를 다쳐 구호소로 찾아오고 안톤은 치료를 하지 말라는 아프리카 인들의 호소를 뒤로하고 의사로서 두목의 다리를 고쳐주지만, 무자비한 두목은 결코 폭력을 멈출 생각이 없다.
<인 어 베러 월드>의 주요한 대립구도는 안톤과 크리스티안에게서 나온다.(물론 둘이 직접적으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둘은 일반적으로 폭력에 대응하는 두 가지의 사회적 반응을 대표하는 인격체들이다. 안톤은 끝까지 평화와 인내로서 폭력에 대응한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결코 폭력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신에게 모욕을 선사한 사람을 찾아갔지만 상대는 여전히 막무가내 폭력을 행사할 뿐이다. 그럼에도 안톤은 아이들에게 “저 사람은 그저 주먹질 밖에는 할 게 없는 못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진거야”라고 얘기하지만 아이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여기서 드는 하나의 의문. 왜 안톤은 폭력을 개인적인 평화적 호소 외에 사회적 질서 속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는가? 첫 번째 폭력이 발생하자 아이들은 경찰에 신고할 것을 종용하지만 안톤은 이를 거부한다. 수반 비에르 감독은 경찰 역시도 공인받은 폭력기구에 불과하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안톤에 반해 크리스티안은 폭력에 더욱 강력한 폭력으로 응징하자는 견해를 시종일관 견지한다. 심지어 자신이 당하지도 않은 폭력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흥분하고 폭력을 선동한다. 사실 영화는 왜 크리스티안이 폭력주의자가 되었는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저 엄마가 죽었고, 크리스티안은 아빠에 대한 원망, 원인모를 분노와 절망감에 사로 잡혀 있을 뿐이다. 크리스타인의 폭력적인 복수는 예상치 못한 끔찍한 결과를 불러 오고 크리스티안은 또 다른 상실감을 느낀다.
<인 어 베러 월드>를 통해 본 세계는 그곳이 덴마크이건 아프리카이건 일상적인 폭력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과 폭력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수잔 비에르 감독은 과연 폭력이 폭력을 멈출 수 있는가를 묻는다. 크리스티안의 폭력적 복수는 더 큰 피해를 불러 왔으며, 아프리카의 무자비한 두목은 ‘어차피 자신이 죽어봐야 소용없다. 나와 친구가 되는 게 그나마 더 큰 피해를 예방하는 길이다’며 안톤을 회유한다. 평화주의자 안톤은 폭력을 되풀이하는 두목에 대해 끝내 자신의 원칙을 깨고 모종의 결단을 내린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두목을 대체하는 또 다른 두목에 의해 상황은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안톤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안톤의 평화주의는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다’는 격언을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물론, 수잔 비에르 감독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적 해결과 이를 통해 희망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믿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래야만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감독의 원칙이 옳다는 것에 동의를 하는 것은 좀 더 거대하고 구조적 폭력을 위치시킬 때에 수월하게 이해된다. 911 테러에 복수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다든가 연평도 포격에 복수하기 위해 우리도 북한을 포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해결이 우선이다’는 주장은 쉽게 이해되고 정당성을 획득하기에도 쉽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 발생한 지하철 막말남 사건과 같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폭력을 도입한다면, 나 스스로도 폭력적 복수에 좀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감독은 거대한 구조적 폭력이나 일상적인 폭력이나 사실은 동일한 원칙에 의해 작동하고 동일한 원칙에 의해 해결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을 던지지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아마 폭력의 달콤함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아프리카에서의 일화보다 덴마크에서의 일화가 좀 더 밀도 높고 집중력이 높은 데에는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아무래도 크리스티안을 연기한 윌리엄 요크 닐센의 연기가 인상 깊기 때문일 것이다.
※ 처음 이 영화의 예고편을 극장에서 봤을 때 제목 때문에 좀 웃었다. <인 어 베러 월드>라니? 예전에 <워터월드>라는 영화를 요즘 개봉했다면 <워러월드>로 해야 하는가... 오렌지를 어린쥐로 발음해야 한다는 이 시대의 풍자인가..라는 잡스런 생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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