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지워도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
대학 입학을 앞둔 아카리(나카 리이사)는 연구에 몰두하며 사는 엄마 카즈코(야스다 나루미)와 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카즈코는 동창으로부터 까맣게 잊고 있던 중학생 시절 사진을 받게 되고, 사진을 보며 오래 전 추억을 떠올리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카즈코는 아카리에게 자신이 개발한 시간여행이 가능한 약을 이용해 1972년 4월 토요일 중학교 과학실로 가서 후카마치 카즈오를 만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아카리는 혹시나 하며 엄마의 말을 따르지만 실수로 1974년 2월로 돌아간다. 2년이나 늦게 도착한 아카리는 어떻게든 카즈오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 여정에 SF 오타쿠 대학생 료타(나카오 아키요시)가 동참한다.
1963년에 나온 쓰쓰이 야스타카의 단편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일본에서 그 동안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리메이크된 경우는 무려 8번에 달한다고 한다. 내가 본 건, 원작인 단편소설과 2006년작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유일하다.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원작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른 후속편인 것처럼 제작되었다. 주인공인 마코토(목소리를 맡았던 나카 리이사가 이번 실사편의 주인공을 맡았다)의 이모 마지가 바로 원작소설의 주인공이었던 것. 따라서 원작소설과 2006년작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건 라벤더 향기가 나는 타임리프를 과학실에서 우연히 획득한다는 것, 그것의 사용횟수는 정해져 있다는 것, 사소하고 소소한 것의 복원을 위해 시간여행을 사용한다는 것, 미래에서 온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 등이다.
기본적인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실사판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원작이나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건 여전히 10대의 생기발랄한 소녀가 주인공이며,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SF 영화임에도 결국 마음을 흔드는 감정과 정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실사판 애니메이션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배경이 과거라는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 미래에서 온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소녀의 이야기가 원작의 주요 뼈대라면 과거로 돌아간 소녀가 과거의 남자와 사랑한다는 설정이 2010년판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뼈대다. 그러다보니 이는 영화에 추억이라고 하는 뚜렷한 색깔을 입힌다. 촌스러워 보이는 머리 스타일과 복장의 사람들이 촌스런 간판이 장식한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보단 일본인들이 더 큰 반응을 보일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미래와 과거의 문화가 충돌하는 데서 오는 예상되는 코믹함을 극도로 자제한 건 놀랍다.
사실 이번 실사판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전반적으로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있다. 자주 시간을 오르내렸던 원작이나 애니메이션과 달리 이번 영화의 시간여행은 초반에 과거로 갔다가 끝날 때쯤 현재로 돌아오는 두 번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 사이에 우리가 보는 건 소녀의 감정이 느리면서도 조금씩 쌓여가는 과정이다. 물론 이는 대단히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보여준다. 거꾸로 누워 서로의 발을 건드리며 장난을 치는 장면이라든가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료타의 옆으로 뛰어드는 소녀의 표정과 이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제하는 료타의 표정, 벚꽃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지는 소녀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애달프게 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두 가지의 주요한 얘기 - 엄마 카즈코의 과거와 아카리의 사랑 - 중 후자에 집중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면 좋은 선택이겠지만, 아카리의 얘기를 조금 빠르게 진행하면서 조금만 줄이고 엄마가 경험한 사랑 이야기가 조금 더 담겼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리고 이 이야기가 조금은 뻔한 경로를 밟아가고 뜬금없는 설정이 개입된다고는 해도 ‘시간을 거슬러 달려가고픈 소녀’의 모습과 그럼에도 바꿀 수 없는 과거로 인한 비극은 마음을 흔들어 살짝 눈물짓게 하는 힘이 있다. 마지막에 료타가 남긴 영상을 보며 아카리가 흘리는 눈물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누군가와의 추억,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 영화의 최대 매력은 주인공을 맡은 나카 리이사의 매력과 동일하다. 처음 포스터 및 스틸컷으로 봤을 땐, 딱히 느낌이 별로 없었는데, 영화에서는 매력이 철철 넘친다. 나카 리이사의 매력지수로만 본다면 이 영화는 100% 효과 달성이다.
※ 딸이 과거로 가서 엄마와 아빠를 만난다는 설정은 확실히 <백 투 더 퓨쳐>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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