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한계와 새로운 가능성의 확인... ★★★★
어째서 마녀 고델(엄마)은 라푼젤을 18년 동안이나 탑 속에 가둬둔 채 키운 것일까? 그렇다고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도 아니다. 둘이 있을 때의 모습은 그저 어느 모녀지간처럼 살갑기 그지없으며, 사랑의 표현도 거칠 것이 없다. 문제는 라푼젤의 머리카락이다. 오래 전 고델은 우연히 하늘에서 내려 온 마법의 꽃을 발견하고는 남이 볼 수 없게 감춰놓고 꽃의 마법으로 젊음을 연장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왕비가 병에 걸리자 왕은 사람들을 보내 마법의 꽃을 찾아오게 했고, 그 꽃으로 왕비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마법은 새로 태어난 라푼젤의 머리카락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처음 고델은 아기의 머리카락 일부만을 잘라 가져가려 했으나 잘린 쪽이나 남는 쪽이나 마법이 사라지자, 아기를 훔친 것이고, 18년 동안 자르지 않고 그대로 기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왕과 왕비는 매년 라푼젤의 생일이 되면 하늘 높이 등불을 올려 아기의 무사귀환을 기원했고, 고델을 엄마로 알고 지내온 라푼젤은 밖에서 등불 축제를 보고 싶은 마음에 엄마에게 부탁해보지만 보호라는 명분하에 거절당한다. 한편, 국왕의 보물을 훔쳐 달아나던 매력적인 도둑 라이더는 우연히 라푼젤이 살고 있는 탑에 숨어들게 되고 라푼젤의 요청으로 등불축제를 보기 위한 모험에 동참하게 된다.
<라푼젤>은 그림형제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지만, 원작의 기본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건 아니다. 원작의 라푼젤은 백설공주, 신데렐라처럼 공주가 아닌 평민 출신이며, 머리카락에 마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심지어 고델이 탑으로 왕자가 찾아온다는 사실도 임신한 라푼젤의 배가 부른 것을 보고 알게 된 것이다. 우리의 전래동화도 그렇지만, 동화(?) 속엔 발목을 자르고,불태워 죽이는 등 온갖 잔인한 형벌이 등장하며, 라푼젤의 경우엔 임신하다는 설정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사실 동화는 동화(?)가 아닌 것이다.
어쨌거나 왜 평민을 굳이 공주로 바꿔 각색했을까? 그건 디즈니가 수행해왔던 고전동화의 영화화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신분 상승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 신분의 상승 내지는 신분의 복원), 그런 점에선 확실히 디즈니의 한계일 것이다. 디즈니의 한계로 또 하나 거론해야 될 것은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이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어쩔 수 없음을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후반부 고델이 사실은 엄마가 아니며 자신이 납치된 공주라는 사실을 라푼젤이 알자마자 반응하는 정도는 너무 급격하고 전형적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 내가 가졌던 생각은 라푼젤이 자신을 낳아준 왕비에 대한 이끌림(낳은 정)과 어쨌거나 18년 동안 길러준 고델에 대한 안타까움(기른 정) 사이에서의 갈등 구조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이런 것까지 바라는 건 디즈니에겐 무리였을 것 같다.
(여러 가지 고려가 있었겠지만, 고델이 훔쳐온 공주의 이름을 그대로 라푼젤로 부르고 생일도 원래 날짜 그대로 지켜준 것으로 봐선 분명 악인이긴 하지만, 라푼젤에 대한 애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후반부의 급격한 하락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반면 각각의 캐릭터들은 고전을 변주해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호기심 가득한 큰 눈망울을 굴리는 천방지축형 말괄량이 라푼젤(탑에서 나와 흥분과 후회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출해내는 장면은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봐도 너무 귀엽다)이나 왕자가 아닌 일개 도둑에 불과한 라이더, 가둬놓고 윽박지르며 학대하는 마녀가 아닌 어찌 보면 우리 주위에서도 볼 법한 과잉보호 모성을 상징하는 마녀 고델, 거기에 라푼젤의 유일한 친구 파스칼(카멜레온)이나 사냥개의 본성을 타고 난 말 맥시머스, 주점에서 알게 된 건달패거리들까지 하나하나 개성이 살아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푼젤>은 3D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 동안 3D 효과를 실감나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고공에서 펼쳐지는 활공 장면이었다. <아바타> <크리스마스 캐롤> <드래곤 길들이기> 등 대부분의 3D 영화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을 포함시켰으며, 관객은 오금 저리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반면 <토이스토리3>의 경우엔 왜 3D로 제작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3D 효과를 실감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흐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3D는 기본적으로 액션 영화에(만) 적용해야 된다는 생각을 심어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푼젤>은 이런 점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이 영화 역시 액션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라푼젤>의 빠르게 진행되는 액션 장면보다 오히려 느리고 정감어린 장면에서 관객은 3D의 효과를 더욱 실감하게 되고 빠져들게 된다. 라푼젤이 탑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땅을 딛는 장면에서 소녀가 느낄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하고, 특히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등불축제 장면에서 3D 효과는 절정을 과시한다. 수 만 개의 등불이 날아다니는 그 아름다운 장면이 가슴 시리도록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 건 다름 아니라 바로 내 눈앞에 스치듯 지나가는 왕국 문양이 선명한 등불 때문이었다.(정말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3D 기술이 단지 액션의 쾌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따뜻함과 정서를 고양시키는 데 봉사하고 있다는 건 분명 새로운 가능성의 확인이다.
※ 21m에 달한다는 머리카락의 느낌도 빼놓을 수 없는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다.
※ <라푼젤>은 디즈니가 제작한 50번째 애니메이션이다. 괜찮은 작품이 50번째를 장식했다는 것도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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