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자체의 놀라움.. 거기에 재미까지 선사하다... ★★★★
설마 설마 했다. 그래도 시작은 정상적(?)이겠지. 어떻게 해서 묻히게 됐는지 보여주겠지. 마치 <007 시리즈>를 연상하게 하는 음악이 도입부를 장식할 때만 해도 나름 기대를 했건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가 보여주는 건 땅 밑에 묻힌 어두운 관 속 외에는 없다. CRT 회사의 트럭기사로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즈)는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가 관 속에서 눈을 뜬다. 인질범은 5백만불의 몸값을 요구하고, 폴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보려 하지만, 아내와 친구는 연락조차 되지 않고, 회사와 국방부는 뾰족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대응만 할 뿐이다. 과연 폴 콘로이는 무사히 살아나올 수 있을까.
<베리드>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오직 한 사람의, 한 사람에 의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관련 잡지나 TV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얻은 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단순했다. 한 남자가 관에 들어간 채 땅 속에 묻혔고,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 속에 갇혀 생매장 당했다는 기본 설정에서 <킬 빌 2>의 생매장 시퀀스를 떠올리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베리드>의 주인공인 폴 콘로이는 무술의 절대 고수가 아니다. 그에겐 인질범이 남겨둔 핸드폰과 라이터, 칼, 랜턴이 있을 뿐이다.
<베리드>의 가장 놀라운 점은 꼼수를 부리지 않은 우직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밀실 속에서 벌어지는 스릴러 장르는 그 자체로 매우 매력적인 장르지만, 연출자가 도전하기엔 만만치 않은 과제일 것이다. <큐브>와 같이 성공적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게는 영화가 설정한 밀실에서 벗어나는 우를 범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가장 가까이는 <심야의 FM>을 들 수 있다. 대체로 영화가 제시한 공간적 제한을 벗어나는 순간, 그러니깐 스스로의 약속을 어기는 순간, 영화의 동력은 사라지고 재미는 급격히 감소된다. 특별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밀실 내에서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게 그다지 쉽지 않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엔 아무리 그래도 1시간 30분을 온전히 관 안에서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며, 최소한 한 두 차례의 플래시백 장면이라도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영화는 플래시백은커녕 핸드폰 통화를 하는 상대방의 얼굴조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채 끝까지 관 속에서만 진행된다. 이건 대단히 놀라운 시도이며,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우직하게 연출했다는 게 재미가 반감됐다는 의미하고 직결되는 건 아니다. <베리드>의 또 다른 성과는 최소한의 공간을 설정하고 그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만족할만한 재미까지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시간 30분 동안 유일한 출연자, 그것도 좁은 관 속에 누워있는 한 명의 인물로 어떻게 그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진행해 나가는가가 아마도 <베리드>의 가장 큰 숙제였을 것이다. <베리드>는 이를 위해 우선 다양한 앵글을 제공한다. 시점숏의 활용과 함께 호러영화적 느낌의 앵글(발밑에서 뭔가를 발견하는 장면), 절망감을 느낄 때 굉장히 깊은 듯 공중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장면 등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모습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바라보는 관객의 눈을 화면에 익숙하지 않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갑갑함에 대한 공포(관객의)를 덜어준다.
다음으로 절묘하게 계산된 듯한 사건의 연출이다. 실로 주인공이 아무 것도 안 한 채, 절망감 또는 무력감에 한숨을 내쉬는 장면은 극히 짧거나 거의 없다고 느껴진다. 끊임없이 뭔가가 발생하고 이러한 사건의 연속적인 발생은 긴장감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 영화를 끌고나가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특히 꼼짝도 할 수 없이 누워 있는 주인공의 바지를 통과해 발밑에서 위협하는 독사의 등장은 꽤나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경험을 선사한다.
<베리드>는 누군가도 말했듯이 영화에는 여전히 아이디어가 필요하며 기존의 관습을 과감히 버리고서도 충분한 재미와 교훈을 줄 수 있음을 입증하는 가장 적당한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베리드>에서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처절한 생존기를 보는 동시에, 노동자를 그저 하나의 부품으로 밖에는 여기지 않는 국가와 거대 기업의 본질을 냉혹하게 직시하게 된다. 긴박하게 돌아가던 영화가 절벽으로 떨어지듯 급격하게 막을 내리면, 우리에겐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함께 자리 잡는다.
※ <베리드>는 한정된 공간, 최소한의 등장인물만 가지고도 좋은 시나리오와 연기, 그리고 연출만 뒷받침된다면 얼마든지 주목할 만한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최고의 사례라 할만하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베리드>를 넘어서는 영화가 과연 나올 수 있을까? 도대체 한 명의 인물, 그리고 관이라는 좁은 공간을 어떻게 넘어선단 말인가. 혹시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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