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의 중심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공개되었을때 쏟아졌던 찬사와 놀라움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두 눈으로, 아니 온 몸으로 느낀다.
오프닝과 동시에 카메라는 나무관 속에 누워있는 한 남자를 비춘다. 간신히 몸하나 뒤집을 만한 공간 속에서 눈을 뜬 남자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라크 전쟁터에서 물자를 나르는 민간인 트럭 운전사인 그는 조금 전 이라크 인들의 습격을 받은 기억만 있을 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땅 밑 관속에 생매장된 상태이다.
그에게 주어진 물건은 자신의 지포 라이터와 누군가 함께 묻어 준 핸드폰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평소 불안증세로 약을 복용 중인 그는 어느새 관객들의 편안한 등짝을 소파에서 떼어내고는 그의 관 속으로 끌어들인다.
인간이 스스로 달아준 날개인 핸드폰으로 그는 미국 자신의 집으로, 옆집으로, 911로, 국방부로, 회사로 전화를 걸어 GPS로 폰 위치를 파악하면 자신을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하지만 아내는 핸드폰을 놓아둔 채 출타중이고 옆집 여자는 그의 격앙된 목소리를 무례하다며 끊어버리고 911은 자국내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방부와 회사는 담당자를 바꿔주겠다며 전화를 계속 돌린다.
이 와중에 테러범으로부터 몸값을 독촉하라는 전화가 걸려오고, 천신만고 끝에 연결된 국방부 관계자는 테러범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만 남기고 책임을 이라큰 주둔 인질 전문팀에게 넘긴다. 테러범의 요구는 점차 수위를 높여오고 한가닥 희망이었던 인질 협상 담당자에 대한 믿음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주는 긴장과 불안증세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그 힘을 잃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영화 "베리드(Buried)"는 주인공과 관객들을 쉴새없이 무자비하게 몰아세우는 것으로 모자라 그 고통을 일체의 소실없이 허탈과 분노로 전이시킨다.
특정 공간에서만 사건이 한정되는 영화였던 "큐브" 나 '킬빌'의 생매장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어떤 영화도 시도해 본적이 없는 역대 최초의 초소형 밀폐공간 영화이다. 등장 인물은 단 한명. 그 어떤 회상 장면이나 설명 장면 하나 없이 영화는 단 1초도 관밖을 나가지 못하고 완벽하게 관속에서 시작해서 관속에서 끝난다. 영화 속 시간 또한 생략이나 비약없이 고스란히 러닝타임 90분과 동기화 함으로서 영화적 속임수나 비현실성을 배제하여 논픽션의 경계로 영리하게 들어온다.
그러나 이 영화가 올해 최고의 스릴러라는 극찬을 받아 마땅한 것은 이 영화가 갖는 형식상의 독창성 보다는 바로 폐쇄성 속에서 무한하게 펼쳐지는 주제의식이다. 눈으로는 옴짝달싹 못하는 관속의 주인공을 향해 있지만 귀와 상상력은 그가 통화하는 건너편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다. 갇힌 쪽과 열린 쪽의 의사소통이 완벽히 차단되고 철저하게 한쪽의 입장이 묵살되는 현장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관객들은 분노심에 입술을 깨문다. 당신이 사회와 조직 속에서 개인의 폭이 얼마나 좁은 것인지 아는 평범한 사회인이라면 영화 [베리드] 의 주인공이 갖혀 있는 그 공간의 폭이 자신들 삶속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느새 깨닫게 될 것 이다. 그래서 그 비좁은 관속에 파묻힌 것으로도 모자라 사회와 회사로부터 처절하게 짓밟히고 유린 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일은 심히 괴롭다.
가족들을 위해 머나먼 이라크까지 와서 열심히 일했건만, 구해달라고 아우성 치는 그의 외침은 오히려 그가 속한 사회와 회사에게는 피해야할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일개 민간인 트럭 운전사인 폴 콘로이의 움켜쥔 손에서 희망이 하나둘씩 사라져 갈때 그의 전화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향한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무너져 가는 한 인간, 가족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그 속에 투영한 반전 메시지. 영화 [베리드]는 아이디어 하나로 "영화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는 이정표를 당당히 제시하면서 괴기스러운 장면 하나 없이 관객들의 피를 말리는 경이로운 신인감독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이다.
필자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흥분에 몇분이 지나도록 자리를 뜨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Filmani cropper 원성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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