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친구들이었을 테지만, 세월이 흐르고 각자의 터전이 생기면 삶의 길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우정도 사랑처럼 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섹스&시티>에서 가장 비현실적이었던 것은 매일같이 연애하고 섹스하는 그녀들의 일상이 아니라, 그녀들 사이의 관계였다. 가족과 연인에게 안착하지 못하는 여인들이 매일 아침 만나 자신의 사생활을 남김없이 털어내며 ‘그래도 우리에겐 서로가 있어’라고 끈끈한 연대감을 자랑할 때, 우리는 그것도 일종의 환상임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혹은 그러한 극도의 친밀감은 그녀들이 싱글일 때 가능했던 것임을 너무 쉽게 지나친다. 하지만 여인들이 자신의 안정된 짝을 만난 순간에는 드라마도 끝나지 않았던가.
올리비아(제니퍼 애니스톤), 제인(프랜시스 맥도먼드), 크리스틴(캐서린 키너), 프래니(조앤 쿠색)는 오랫동안 추억을 나눈 친구들이다. 그러나 현재 그녀들은 각기 다른 인생의 행로를 가고 있다. 제인은 성공한 의상디자이너이자 독특한 취향의 남편을 둔 유부녀지만, 일상의 따분함에 지쳐 냉소적으로 변해간다. 크리스틴은 남편과 함께 각본을 쓰고 있지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심한 남편과 날마다 충돌하며 이혼을 고려 중이다. 프래니는 자상한 남편과 함께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들 중 유일한 싱글인 올리비아는 자신이 가르치던 돈 많은 학생들에게 자존심을 다친 뒤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궁핍한 일상을 견뎌가지만, 자신을 떠난 유부남 애인을 잊지 못하는 구질구질한 나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니콜 홀로프세너는 이미 데뷔작인 <워킹 앤 토킹>에서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여성의 미묘한 심리를 다룬 바 있다. <러블리 앤 어메이징>에서도 30대 여성의 강박관념, 불안과 방황 등을 특유의 세밀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냈다. 2006년 선댄스영화제 개막작인 <돈많은 친구들>은 그러한 전작들 속에 등장했던 젊은 여성들의 중년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세월은 흘러 그녀들은 결혼을 하고 주름살은 늘었지만, 이들의 관계가 그만큼 깊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친구’지만, 각자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는 데 반해 그 무게는 진심으로 소통되지 못한다. 영화는 네 여자들의 일상을 교차시키고 이들의 어긋나는 관계들을 보여주는 가운데 우정으로도, 사랑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쓸쓸한 공허감을 제시한다. 감독의 전작들처럼,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잔잔하지만, 인물들의 대화나 얼굴 표정 등의 상당 부분이 핸드헬드로 촬영됨으로써 여인들 내면의 요동치는 울림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지나치게 설명하거나 과잉된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영화가 선택한 방식은 이처럼 미세한 표정과 인물들 사이의 묘한 감정적 흐름을 잡아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니콜 홀로프세너의 캐릭터 세공 능력은 여전히 재치 넘치고 예리하다.
<돈많은 친구들>에도 네명의 여자친구들이 나오지만, 이들의 관계는 <섹스&시티>가 자랑하는 여인들의 관계와 다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결혼한 세명의 친구와 한명의 싱글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중 누군가는 엄청나게 부유하고 누군가는 매우 가난하며, 또 누군가는 원만한 부부관계를 자랑하지만, 누군가는 이혼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 같이 적절하게 잘나갔던 캐리와 그녀의 친구들에 비해, 이들의 관계는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불균형적이다. 그러므로 이 네명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수다를 떠는 장면들에서도 이들이 진정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듯, 감독은 “돈문제가 친구들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지만, 돈이 이들의 순수했던 우정을 망쳤다는 식의 단순한 가치관을 설파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때때로 우리를 좀더 냉정한 상황 속으로 던져놓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이 신발을 사기 위해 거침없이 80달러를 소비하는 프래니와 하루 종일 남의 집 변기와 냉장고를 청소하고 80달러를 버는 올리비아는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당장 사용할 화장품이 없어 샘플을 모아 오는 올리비아의 생활고와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삶의 지리멸렬함에 지독히 불평하는 제인의 고민은 동일한 수준의 것일까. 물론 우리는 진정한 우정은 경제적인 차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배웠지만, 이처럼 극과 극의 삶을 사는 이들이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웃고 있는 모습은 우정이 아니라 가식과 거짓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이 영화의 날카로운 지점이다. 이야기의 구성이 백인 부르주아 여성들의 갱년기적 증세 혹은 남편과의 불화로만 엮이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화의 결말을 상기한다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올리비아가 없었다면 <돈많은 친구들>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섹스&시티>에서 여인들의 진심은 그들이 함께 있을 때 가장 솔직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돈많은 친구들>에서 진심은 이들의 모임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무심하게 내뱉어진다. 서로에게 감춰진 불행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밀하게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감추고 사는 여자들. 이제 이 중년 여성들의 관계는 서로의 불행에 의해 지탱된다.
덧붙이며. 이 여배우들, 한때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들, 왜 다들 이렇게 슬프도록 피로해 보이는지. 단순히 연기라고 찬탄하기에는 이들 얼굴에 쌓인 세월의 흔적이 너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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