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홀)은 로키 산맥 ‘어디쯤’에 자리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수천 마리의 양떼를 방목하는 일에 고용된 스무살의 청년들이다. 그들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풍경 속에서 인간이 아닌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들은 뒤뚱이며 걸어가는 양이자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이고, 헐겁게 출렁이며 흘러가는 강물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 구분이 사라진 ‘브로크백 마운틴’은 스스로가 이성애자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에니스와 잭에게 동성애라는 낯선 사랑을 선물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의 실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은 그 감정에 있어 성숙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계산적이지 않을 수 있는 어린아이이다(이는 은유가 아니다). 잭과 애니스에게 찾아온 사랑이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그들을 휘어감는 ‘순간적인 매혹’이라는 면에서 미학적 대상이다. 섬광과도 같은 순간의 힘이 미학적인 사랑의 출발점일 수는 있으나, 그 관계의 지속은 미학이 아닌 윤리학의 영역에 위치하고, 사랑이란 미학과 윤리학의 변증법 속에서 완성되는 법이다. 이러한 면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이 보여주는 20년간에 걸친 에니스와 잭의 삶의 궤적은 미학적 매혹의 순간이 윤리적 지속에 실패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정한석이 지적한 것처럼(<씨네21> 541호), 리안의 영화는 인물(들)이 감추어놓은 ‘비밀’이 서사의 중심을 이루곤 하는데, 비밀에 대한 인물들의 태도가 관계의 지속과 실패를 결정짓는 윤리의 영역과 맞닿는다. 이 비밀의 공개를 낭만적으로 해결하는 초기 영화들과 다르게(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완전한 해피엔딩이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 피로연>의 엔딩에서 ‘두팔 들어’ 항복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상기하라), 할리우드 진출 이후의 작품에서는 비밀의 폭로가 관계의 단절 혹은 파국과 관련맺곤 했다. 비밀이 삶 속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지 못하고 비극적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마찬가지다. 에니스와 잭(특히 에니스)에게서는 관계의 지속을 위한, 달리 말해 감추어놓은 비밀을 삶으로 통합함으로써 적극적인 삶의 주체가 되려는 윤리적 태도가 부재한다(물론 이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방목철이 끝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온 에니스와 잭은 각각 다른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재회했을 때, 추억 속에서만 은밀하게 간직하면 되었을 비밀은 현실의 커튼 뒤에 감추어야 할 버거운 대상으로 바뀐다. 그들이 공모한 비밀은 자유(보로크백 마운틴에서의 낭만적 사랑)와 의무(가족)의 충돌을 낳고, 이는 자신들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연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모든 타자의 삶까지도 황폐하게 한다. 에니스와 잭의 삶을 병렬식으로 보여주는 20년의 시간은 이러한 악순환의 연속이다. 자유와 의무의 충돌을 무협이라는 장르 속에 펼쳐 보였던 <와호장룡>은 장르 고유의 스펙터클이 이러한 주제까지 파악하지 않더라도 즐거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보호막 구실을 했다면,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러한 보호막을 거둬내어, 순간적인 자유를 위해 의무의 영역을 황폐화시키고 굴레 같은 의무에 갇혀 자유를 그리워하기만 하는 악순환의 반복을 통해, 그 버거운 대상에 허덕이는 에니스와 잭의 삶을 날것 그대로 펼쳐 보인다.
영화의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질식 이전 상태의 에니스와 잭의 삶을 담아내는(초반의 광활한 자연 장면과 대조적으로 중·후반의 장면들은 실내의 답답한 공기를 담아내는 데 치중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영화이자 동성애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열정은 있으나 그에 풍덩 빠져들지 못하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좌절에 대한 영화에 더 가깝다.
결혼 서약 직후 구토를 하지만, 막상 4년만에 만난 잭과 키스를 나눌 때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에니스, 그리고 이러한 눈치보기를 20년간 반복하는 그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다. 사실 <보로크백 마운틴>의 주인공은 복수(複數)가 아니다. 에니스가 동성애자를 죽였던 어린 시절의 ‘비밀-기억’(그는 잭에게조차 아버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한다)에서 도망치는 비겁함을 보일 때, 사라지지 않은 기억의 유령은 사랑의 지속을 위한 윤리적 태도의 가능성을 앗아간다. 동성애자이지만 동성애자를 죽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니스는 자신이 일조한 사회적 편견에 의해 스스로가 희생되는 모순적 대상이다. 비겁함이 굴레를 만들고, 그럼으로써 ‘비밀-기억’으로부터 소외된 에니스는 남편, 아버지, 연인으로서의 모든 관계와 자기 자신의 삶까지도 황폐하게 만든다.
삶의 오묘한 비극성은 삶의 지혜란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이후에야 도래한다는 데 있다. 에니스가 자신이 겪은 비극의 원인이 외부의 편견이나 억압 혹은 신의 운명에서 도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잭의 죽음 이후에야 찾아온다.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목적으로서의 대상을 상실한 이후에 찾아온 깨달음이 허망한 것이듯, 영화 엔딩의 “맹세할게’(I swear)라는 에니스의 대사에서 부재하는 목적어는 ‘맹세’라는 단어에 내포된 미래 지향성을 모호하게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에니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에로스’로서의 삶을 완성할 수 있는가를 반어적 방식으로, 즉 ‘우리는 어떻게 사랑과 열정에 빠져들기를 포기함으로써 삶을 망치게 되는지 보여줌으로써 성취해냈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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