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오지 않을 날들과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위무....★★★★
<토이 스토리 3>은 훌쩍 커버린 앤디가 대학 기숙사로 떠나게 되면서 남게 될 장난감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앤디의 결정은 우디는 대학 기숙사로 같이 가고, 나머지 장난감들은 다락에 올려 놓는 것이었지만, 앤디 엄마의 실수로 장난감들을 버려지게 되고 여러 착오를 거치며 탁아소에 기증되게 된다. 처음 탁아소는 이들에게 일종의 낙원으로 다가오지만, 알고 보니 그곳은 랏소라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험난한 곳으로 앤디의 장난감들은 우디를 중심으로 다시금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1995년 처음 <토이 스토리>가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세상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첫째는 온전하게 100% 디지털로 만든 장편 애니메이션이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단순한 기술적 과시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 라인으로 무장해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만약 <토이 스토리>가 단순히 뛰어난 기술적 진보만을 현시했었다면 지금에 와서 고전으로 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로 이제 겨우 픽사의 등이 보일 정도로 거리를 좁혔다고 생각했을 드림웍스가 <토이 스토리 3>에 대해 느낄 감정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잠깐 시리즈 전반을 더듬어보자면 <토이 스토리 1>이 다른 장난감의 등장에 따른 위기를 그렸다면, 2편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난감들의 비애, 3편은 이제 아예 장난감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게 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3편을 보다보니 묘한 생각이 든다. 그건 장난감과 앤디의 관계가 사실은 도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장난감 주인인 앤디가 장난감들을 보호하고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들이 앤디를 보호하고 챙기는 관계라는 것이다.
3편의 마지막 부분에 남게 될 장난감들은 앤디와 대학 기숙사로 같이 떠나게 될 우디에게 “가서 앤디를 잘 보살펴” 등등의 작별 인사를 한다. 3편을 보러 극장에 가기 전에 집에서 1편과 2편을 연달아 다시 봤는데, 거기에서도 비슷한 대사들이 등장하며, 사실 <토이 스토리>는 아이의 부재에 대해 부모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라는 어떤 평론가의 견해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이런 차원에서 어른들이라면 (그것도 아이가 있는) 이제 곧 떠날 아이의 방에 들어와 텅 빈 방을 둘러보며 엄마가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같이 눈물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이 영화의 장난감들이 벌이는 모험이 재미없을 리 없고, 이 과정에서 웃음이 터지지 않을 리 없다.(스페인어를 내뱉는 버디라니...) 그런데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영화가 주는 재미를 뛰어 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재미와 흥미를 주는 중반부를 넘어 (곰이 지배하는 독재 체제에 대한 묘사도 너무 직설적이지만 음미할 부분이 많다. 대게 독재가 가장 최측근의 배반으로 무너지는 것처럼 영화 속 체제도 그러하다. 그러나 분명 독재자임에도 아이에게 버림받아 독재자로 변신한 랏소의 과거에 뭉클해질 수밖에 없다) 후반부로 갈수록 눈자위가 뜨거워지고 결국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어진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다시는 오지 못할 날들이 있다. 특히 어른이라면 더더욱. 우디와 버디, 그리고 다른 장난감들이 앤디와 즐겁게 놀던 때는 다시는 오지 못한다. 앤디가 훌쩍 커버렸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버려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이들은 충분히 행복할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그러하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부재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다. 아이는 커서 언젠가는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된다. 텅 빈 방을 보며 눈물짓는 엄마를 바라보는 우디의 눈동자는 “괜찮아요. 언젠가 올 때가 왔을 뿐이에요”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토이 스토리 3>의 마지막은 정말이지 어떻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장난감들과 놀아주는 앤디의 표정과 떠나는 앤디를 바라보는 장난감들의 표정은 마음에 찌든 때를 벗겨내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렇다. <토이 스토리 3>은 다시는 오지 못할 날들을 그리워하는 이들과 누군가의 부재로 남겨져 힘들어하는 이들에 대한 가장 뜨거운 위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