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영화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토이스토리 1편(1995)은 '픽사' 라는 회사를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상에 머물게 만든 걸작이자 전설 이다. 기술과 감성의 그 놀라운 만남은 그 이후 만들어진 작품들에게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만화영화에도 갖추어야 할 '수준'이 있다는 매우 피곤한(?) 선을 그어버렸다. 애니메이션 최초로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한 [토이스토리2] 를 기점으로 픽사 작품들은 해가 거듭될 수록 내공과 원숙미가 깊어지면서 [니모를 찾아서] [라따뚜이]와 [월-E]를 거쳐 [UP]에 이르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까지 오르게 된다.
이제는 아이들 손에 끌려가던 장르가 아니라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을 끌고 극장을 찾게 만들었고 화려한 색채와 움직임만으로 마냥 즐거운 아이들 옆에 눈물을 훔치고 있는 어른들이 함께 객석에 존재하는 상황이 매번 연출되는 것이다.
[토이스토리 2] 이후 11년만에 개봉한 [토이스토리 3] 는 역시 픽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교하기 이를데 없는 3D 기술과 작품성, 그리고 4억불 돌파를 눈앞에 두고 역대 10위 라는 흥행 대기록의 세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았다.
15년이나 된 [토이스토리] 시리즈가 지금까지도 가장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놀라운 철학적 깊이를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디는 앤디의 장난감 중에 가장 사랑 받는 존재이다. 그 사랑의 불균형이 그대로 권력의 불균형으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우디의 서열은 장난감들 사이에서 맨 앞이다. 하지만 우디는 그 권력을 남용하기는 커녕 자신의 주인인 앤디의 장난감들을 모두 아끼고 존중하는 리더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앤디가 '우디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인형' 이라는 말로 그의 존재성을 재확인 시켜주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대상에 대해 믿고 신뢰하는 마음가짐은 그 대상이 실제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가슴 뭉클하게 그려낸다.
토이스토리는 이렇게 인간들이 평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가지 철학적인 고민들을 심도 있게 풀어놓는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김춘수의 '꽃'과 영화 [토이스토리]는 근본적으로 똑같은 주제인 '존재론'에 근원을 두고 있다. 몸부림에 불과한 대상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듯이 장난감들은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됨으로서 장난감으로서의 존재의 가치를 갖게 된다.
1편에서 자신을 우주의 수호자로 착각하고 있던 버즈는 결국 자기 스스로 규정했던 존재의 가치를 고통스럽게 버리고, 자신은 누군가의 장난감이라는 의미론적 존재를 고통스럽게 받아 들임으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존재라는 것은 과학적이고 보편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의미를 인정받음으로서 결정된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 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번편에서 장난감들은 대학생이 되어버린 앤디로 부터 버림 받는 상황을 순순히 받아 들인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2편에서 부터 계속 제기되어온 문제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언젠가 앤디의 사랑을 더 이상 받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디 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한 갈등도 잠시 [토이스토리3] 편에 이르면 드디어 앤디의 장난감들은 자기 존재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스스로 내리게 된다. 이것은 자신들의 존재의 이유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주체 로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장난감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오직 앤디라는 주인으로부터만 부여받을 수 있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다른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어줌으로서 스스로에게 진정한 자유를 부여하고 그 존재감을 더욱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놀라운 의식의 발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들을 옭아맸던 '사랑' 이라는 가치에서 냉정하게 한발짝 물러나 '우정'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관념 으로 똘똘 뭉침으로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성숙함도 함께 보여준다.
주인의 실수를 평생 원망하면서 악당으로 변모한 랏소베어는 우디와 그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자신을 아끼고 보살폈던 주인과의 추억은 망각한 채 비정해진 스스로를 합리화 시킨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상대의 진심을 깨닫지 못하게 되거나, 모른체 하면서 진실에서 멀어져 간다. 전달되지 못한 진심으로 인해 상대에게 준 상처가 오랫동안 봉인되기도 하고 다행히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된 진심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기도 한다.
너무 멀리 와버린 랏소베어의 닫혀버린 마음은 끝까지 열리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마지막 순간에 진심을 알게된 앤디의 장난감 들은 너무나 감동적인 이별과 함께 새출발을 맞게 된다. "이별에도 성의를 다해야 한다" 는 깨달음을 주는 아름다운 엔딩 장면은 아무리 차가운 심장을 가진 이 조차도 당황하게 할 만큼 뭉클한 순간을 선사한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한낱 무생물에 불과한 인형들에게 동질성을 부여하고 마음을 연다. 세월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검은 비닐봉지에 그것들을 매정하게 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앤디는 추억을 함께한 그 한낱 미물들에게 잊지 못한 아름다운 이별을 선물한다. 앤디가 자신의 인형들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장면은 픽사의 굉장한 내공을 가슴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버렸던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미물 들. 한 때는 내 삶의 한 부분과 함께 했고 나 때문에 존재의 이유를 가질 수 있었던 많은 잊혀진 것들. 법정 스님은 우리에게 우리에게 무소유, 그리고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이름표가 없는 수없이 많은 것들에게 이름표를 달아주고 추억을 함께하는 것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 토이스토리는 진하게 우리에게 말해준다.
내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리고 수 많은 내 주변의 소유물들이 나로 인해 의미를 갖게 되었다니. 곱씹어 생각할 수록 참으로 무섭고 골치아픈 영화 아닌가...
Filmania cropper, 원성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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