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참전 용사인 류목형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구원의 길에 나선다. 그의 결연하고 비장한 구원을 향한 의지는, 그의 모습에 감화돼 찰나의 정의를 선택한 전직 형사 천용덕과 손잡으면서 여지없이 굴절된다. 모든 선이 악을 제압할 것이라는 생각은 동화 속에 나오는 환상일 뿐 현실에서는 비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애초에 선은 악의 위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류목형을 두고 “가벼운 도둑은 겉을 뺏지만 진짜 악마는 마음을 훔친다”고 했던 삼덕기도원 원장의 말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결국 맹목적 선과 저열한 악은 모두 파멸의 길을 면치 못한다.
류목형이 지상천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작은 마을은 이미 죄악과 타락이 넘실대는 지옥으로 변했다. 그 지옥에서 그의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는, 의절한 아들 해국(박해일) 역시 결국 진실을 가장한 집착의 소유자일 뿐이다. 구원과 진실을 향한 집착은 이십 년 의절의 시간을 뛰어넘어 대물림한다. 과연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영화 ‘이끼’는 극도로 강렬하게 살아 넘치는 원작의 캐릭터에다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를 덧입혔다. 전직 형사이자 마을 이장, 천용덕을 연기한 정재영의 연기는 그중 압권이다. 긴 상영시간이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감독의 역량에 기댄 바 크다. 최고 흥행 감독이 빚어내는 영화적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원작에 상당히 의존적이면서도 원작의 분절과 압축, 비약과 생략에서 느껴지는 긴장의 미학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만화가 더 쉽다”고 정말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 꼭 그러한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올드 보이’나 ‘타짜’가 금방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이끼’는 여러 모로 아쉽다. 인간의 ‘구원과 파멸’ 문제를 섬세하게 그려 놓은 원작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드라마에 집착하여 스릴러의 정교함을 잃었고, 통 큰 주제의식을 밀고 나가려는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원작과 다른 느낌을 주는 인물들의 캐릭터도 외려 작품의 일관성을 해친다. 유해진의 유머는 빛나지만 생뚱맞으며, 유준상의 발랄함은 지나치게 얕아 보인다. 원작의 열린 결말구조를 대신한 영화 ‘이끼’의 엔딩 신은 그중 치명적이다. 이제는 너무 뻔한 상투적 반전구조는 영화가 묻고자 했던 의미를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5일 만에 관객 100만명을 돌파한 영화를 보지 않기는 쉽지 않다. 쉽지 않으면 재미있게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영화 ‘이끼’를 보는 팁 몇 가지를 전한다.
원작을 보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영화 ‘이끼’를 보기 위한 최고의 조건을 갖췄다는 사실에 뿌듯해할 것,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보고 싶은 충동을 최대한 자제할 것, 그리고 ‘공공의 적’을 만든 감독 역량을 최대한 믿어 볼 것, 그러고는 말 그대로 ‘즐감’하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