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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ot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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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14 오후 6: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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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옥의 티를 찾으며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영화 속 간접광고인 PPL을 찾으며 흐뭇해 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어떤 낱말이 영화 속에 몇 번 나왔는지 세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뭐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주로 소품에 집착한다. 왜 그 소품을 썼는지, 그 소품에 담긴 의미는 어떤 건지.. 물론 영화를 관람할 당시에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보는 건 아니고 보고 난 후에 돌이켜 생각해 보는 편이다. 이번엔 ‘훔친 물건’이 자꾸 생각났다.
“뭐든 말만해. 다 훔쳐 줄 테니” 영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시켜줘>에서 효진(신은경 분)의 남자’친구’ 준(공형진 분)은 효진이 원하는 것,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준다. 그것도 훔쳐준다. 사서 주는 것은 돈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훔쳐서 주는 것은 다르다. 거기에는 용기와 배짱과 눈치와 날렵한 손동작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훔치다 걸렸을 때 당할 신체적, 정신적 모욕과 곤욕과 수모를 무릅쓰고도 절도를 결행하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수없으면 감옥에 갈 수도 있고 평생 전과자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준은 효진을 위해 여러 가지 물건을 훔쳐준다. “음… 그 친구 정말 대단하군” 라는 말이 한숨처럼 나온다. 그리고 ‘나도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나 내게 그런 친구가 생기길 바라는 일보다 차라리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는 쪽이 더 쉬울 것이다. 아무튼 준이 훔쳐주는 물건의 목록을 한 번 적어보자. 거기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알아보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내 기억이 맞다면, 준이 효진에게 훔쳐준 물품(사람도 있다)은 모두 다섯 가지다. 안주그릇, 쿠션, 간이의자, 결혼반지, 연하의 남자. 자, 그럼 하나씩 살펴볼까?
안주그릇 효진이 ‘이쁘다’고 말한 걸 기억했다가 훔쳐주는 물건으로 말 그대로 안주를 담는 그릇이다. 모양은 아주 넓은 컵이고 스누피가 그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예쁘고 귀엽다. 플라스틱 재질에 큼직해서 실용적이다. 안주그릇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사용해도 좋다. 가령 필통이나 액세서리통 등으로 말이다. 쿠션 효진이 특별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준이 알아서 훔쳐준 물건으로 검정색 줄무늬의 직사각형 쿠션이다. 특별히 예쁘진 않지만 그런대로 세련되어 보인다. 또 푹신해서 외롭고 심심한 날 안고 뒹굴기 좋다. 벽에 기대어 앉을 때는 허리에 받혀 쓰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울 때는 겨드랑이에 끼우면 그만이다. 다시 말해 쿠션의 활용범위는 무궁무진하다. 또한 아무리 무거운 몸으로 눌렀다 하더라도 금방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믿음직하다.
간이의자 준의 결혼 전날이자 효진의 생일 하루 전날 엄청 취한 준이 효진을 위해 훔친 물건이다. 나중에 귀가하다 택시에서 내려 다리 위에서 효진은 이 의자에 앉아 울고, 준은 그 옆에서 오바이트한다. 주로 기사식당이나 대폿집 같은 데서 흔히 보는 플라스틱 의자다. 가볍고 튼튼하고 자리를 적게 차지한다. 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앉기에는 안성맞춤인 의자다.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이 멀쩡한 재떨이를 두고 이 의자 다리에 담배를 비벼 끄기 때문에 군데 군데 다리에 시커먼 화상 흔적이 남아있다.
결혼반지 자신의 결혼식 날 효진이 신부의 손에 끼어져 있는 반지를 보고 ‘예쁘다’고 하자 준이 훔쳐주는 물건이다. 결혼반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도 요즘은 대개 다이야몬드로 한다. 그래서 아예 다이아반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이야몬드가 결혼반지로 사랑 받게 된 데에는 그것이 가진 눈부심, 단단함, 불변성 등의 속성을 결혼으로 끌어오려는 가당찮은(?) 의도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아한다. 물론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중배의 다이아반지를 그렇게도 좋아했던 심순애 때부터 여성의 다이아사랑은 유구하다. 사실 반지는 일상생활에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특히 결혼반지는 그 형태가 돌출되어 있어 걸리적 거리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광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데에는 결혼반지가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원래 반지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알라딘의 반지가 그렇고 반지의 제왕이 그렇지 않은가? 연하의 남자 결혼 후 만난 커피숖에서 준이 선물하는 물건, 아니 사람이다. 눈 밝은 준이 좋은 남자로 현수를 찍자 얼떨결에 효진이 고른 어린 남자다. 여자들이 생각하는 연하의 남자는 무조건 나이가 어린 남자를 일컫는 게 아니다. 거기엔 어떤 속성이 분명히 있다. 피부가 뽀얗고 이목구비가 예쁘장하고 자기 주장이 약하고 고분고분한 남자. 여자를 지배하려고 덤비는 ‘마초’가 아니라 여자에게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어린 남자를 ‘연하의 남자’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런 정의는 아슬아슬하다. 왜냐하면 남자라는 존재는 특수성보다 일반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는 ‘이런저런’ 남자가 있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남자’가 있다는 말이다. 연하의 남자도 마찬가지라서 언제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마초’의 본능을 드러낼지 모른다.
남자’친구’에 대한 비유 이미 눈치챘겠지만 위에 적힌 훔친 물건은 여자가 생각하는 좋은 남자’친구’에 대한 비유이다. 즉, 안주그릇처럼 예쁘고, 쿠션처럼 푸근하고, 때로는 간이의자처럼 편하고, 또 때로는 결혼반지처럼 멋지고, 가끔은 연하의 남자처럼 말랑말랑하고 재미있는 그런 남자’친구’에 대한 비유 아닐까?
준의 마음에 대한 비유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 물품들은 준의 마음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도 효진처럼 준의 마음을 외면해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 준은 그저 친구일 뿐일까? 효진은 그렇다 치고 준도 효진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준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 존재한다는 것, 그건 야부리야.” 그렇다. 말도 안 되는 ‘야부리’다. 그렇다면 준이 효진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준이 효진을 위해 훔쳐주는 물건의 목록을 보면 거기 어떤 ‘점층’의 구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주그릇, 쿠션, 간이의자, 결혼반지, 연하의 남자. 훔치기 쉬운 물건에서 점점 훔치기 어려운, 혹은 훔칠 수 없는 물건으로 커져 간다. 그만큼 가치나 의미도 커지고 무거워진다. 선물에는 선물한 이의 마음이 투사된다. 그러므로 준의 마음도 그렇게 ‘점층’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벼운 안주그릇처럼 심심할 때 재미있는 친구에서, 쿠션처럼 푹신하고 편하고, 간이의자처럼 앉아서 꺼이꺼이 울 수 있는 듬직한 사람으로 진행한 것은 아닐까? 겉으로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랬지만, 어쩌면 결혼반지를 손에 끼워주며 근사한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준은 장가를 가고 효진에게 ‘남자’를 선물하려고 한다. 결국 피식 웃고 마는 연하의 남자였지만 말이다. 이미 결혼한 몸인 준은 ‘연하의 남자’로라도 그렇게 효진 곁에 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와서 돌아보니 제목이 너무 거창했다. 그래도 그냥 두기로 했다. 그 제목에 내 마음도 깃들여 있는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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