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얼마나 환경에 영향을 받는지, 살려는 의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조차 바꿀 수 있는 동물인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예언자>는 과연 올해 최고의 작품이라는 홍보 문구가 그리 과장은 아니며 각종 영화제에서의 수상과 노미네이트가 이를 뒷바침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무려 2시간 30분이 넘는 런닝타임을 통해 학교조차 다니지 못해 읽지도 쓰지도 못한 힘없는 19세 소년 말리크가 또 다른 작은 사회인 교도서에서 최고의 실세인 코르시카 갱 두목 세자르를 통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생존의 방식을 배워 나가며 조직의 거물로 성장하는 과정을 감정없는 차가운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 말리크가 수감되어 자신의 신발조차 지킬 수 없는 나약함을 부각시키고 조만간 그에게 닥칠 시련을 암시하며 불안감 속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그리고 절대 권력 세자르의 거부할 수 없는 살인 명령에 어쩔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을 냉혹하지만 차분하게 보여 줍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여야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말리크는 살아 남기위한 선택을 합니다. 말리크를 비난해야 할까요? 살인이라는 큰 죄악을 저질렀다며 손가락질 해야하겠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보고는 차마 그런 도덕적 잣대를 댈 수 없었습니다. 지금 내 자신도 살아 남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생존을 걸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으니까요.
세자르의 심부름을 해 낸 공로로 말리크는 세자르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교도서 내 이슬람 조직이 성장하는 상황이 되자 세자르 조직에서도, 이슬람 조직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며 다시 생명에 위협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말리크도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조직을 이용하고 배신합니다. 세자르의 힘이 없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기에 그의 심부름을 계속하면서도 그 조직에서만 영원할 수 없을 것이란 예정된 길을 알기에 말리크는 미래를 대비해 상대 조직에 미리 살아갈 방법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 때문에 말리크는 영화 제목처럼 <예언자>가 되어 자신의 운명을 과감히 바꾸며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굳혀 갑니다.
중반부부터 말리크가 여러 조직간 뒷 조종을 통해 미래를 예견한 자신이 살아갈 방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초반만큼 몰입도가 떨어져 긴장감이 떨어지는 아쉬움은 있지만 후반부 말리크에게 세자르를 넘어설 마지막 중요한 관문이 진행될 때는 초반부 이상의 긴박감으로 휘몰아칩니다. 특히 장갑차 안에서의 총격 장면은 초반부 면도칼로 처음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의 충격을 되살리며 마치 <대부>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어쩌면 영화 스토리의 유사성과 이런 장면들로 <예언자>가 <대부>에 견주어지기도 하겠지요.
날카로운 현실 판단과 생존을 위한 욕망이 자신의 운명조차 바꿔가는 모습은 <예언자>의 볼거리이고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만드는 모습을 별다른 연출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담아내는 카메라의 모습은 다른 볼거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은 굳이 비평가가 아니라도 좋은 작품이란 느낌을 받았지만 딱딱하고 재미없을 거란 걱정은 필요없어 보입니다. 150분이나되는 상영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