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위한 복수는 서서히 사라지다 고요한 산속에서 칼을 갈고 있는 청년이 있다. 얼굴은 선하고 밝게 생겼는데, 어느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무술 연마를 매섭게 하고 있다. 알고 보니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불철주야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흔히 무협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한 아들은 이렇게 표현된다. 복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방에게 쌓인 원한 갚기이다. 이 소재를 사용하는 극들은 굉장히 많았다. 시대가 바뀌고 어떤 상황이 도래하면, 아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아들에게 “나는 이런 연유로 칼을 맞았고, 너는 어떤 식으로 나아가고 복수를 해야 한다”는 식의 복수의 전주곡을 읊을 테다. 힘겨운 삶을 살아갈 아들은 복수의 전주곡이 아닌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유언을 남길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버지(귀도 역,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어려운 상황에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상황과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야생 <더 로드(The Road)>는 길 위에 펼쳐지는 인생이 아니라 길 위에서 마지 못해 살아가는 인생을 나타내고 있다. 야생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리얼 버라이어티 야생 프로그램 “1박 2일”은 쇼 프로그램으로, 야생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때로는 작위적으로, 때로는 여실히, 때로는 어설프게 보여주고 있다. 시청자들은 웃고 즐긴다.
야생이 생활로 다가오면 어떨까? 당장 몸부림치고 소리를 지른다.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 받아들여야 하나? 받아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 이상, 더 이상은 없다 <더 로드>는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 끼니를 때워가며 가슴 속에 불씨를 지닌 착한 사람을 만나 사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이다. 그 이상은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음식, 희망, 가족, 성(Sex) 등 당장 몇 가지가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더로드>를 보면 사람은 죽지 못해 사는 인간이다. 더 이상은 없다.
인생에 있어 그 이상, 더 이상이 없다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 비루한 몸만 남는다. 이것은 갖고 다니기도 힘든 소유물이 된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에 총구를 겨누고, 당장이라도 죽을 생각을 한다. 울고 불고 난리를 쳐도 어쩔 수 없다.
자연에게 떡 실신 된 인간 이 영화는 기타의 전쟁, 재난 영화와 다르다. 아버지와 아들은 피난 가듯 하지만, 전쟁 영화처럼 무력을 피하는 피난은 아니다. 재난 영화처럼 쓰나미가 밀려오고 산사태가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져 자연의 힘을 사람의 힘으로 이겨내는 인간 지상주의도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 자연에게 눌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서로 죽이고 심지어 잡아 먹기까지 한다. 성별, 인종과 무관하게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인간들이 나를 죽이려는 사람으로 생각해버린다.
소위 “세상이 각박해져도 아직 저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돌아간다”고 한다. <더 로드>에서도 이런 인간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언제 적이 될지 모른다. 그럴수록 사람과 부딪혀야 해서 더 힘들어진다. 가장 똑똑한 줄 알았던 인간은 가장 의심 덩어리가 되었다.
영화 속 인물 중, 90세 할아버지의 “자연의 경고”는 바로 이런 점을 나타낸다. 인간이 하찮은 존재임을 느끼는 순간, 자연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연은 공포로 다가온다. 인간은 자연을 거스르고 살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 가다가 아들이 곤충을 발견한다. 아들이 묻자, 아버지는 딱정벌레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곧바로 하늘로 날아간다.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는 딱정벌레는, 인간보다 훨씬 나은 존재였다.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끼니를 구하기 위해 이것저것 뒤질 필요도 없다. 인간은 철저히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간 곤충보다 못한 것으로 전략해버렸다.
명품 보다 더한 사치 100원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000원을 쓰면 사치다. 10,000원이 있는 사람이 1,000,000원짜리 명품 가방을 사도 사치다. <더 로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버지: "죽고 싶단 생각해요?" 길에서 만난 노인: “이런 세상에선 그것도 사치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살고 싶어도 살기 힘든 세상. 배고픔도 이겨낼 자신도 없다. 죽음을 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죽고 싶단 생각이 그런 세상에서 사치라고 말한다면, 죽거나 살거나 하는 의미가 없다. 그런 세상에서는 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도 필요 없고, 고급 승용차, 강남의 빌딩도 필요 없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뿐이다. 어디로 떨어질 지 모른다. 어디로든 떨어지면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의 반대말이 싫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은 끝없는 관심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고, 삶은 죽음의 반대가 아니다. 생사는 그저 둘 사이의 어중간한 어디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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