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울고 분노하다가, 끝내는 박수를 보낸다.... ★★★★☆
영화가 끝난 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였다. 이 압도적 비주얼 앞에서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다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을 보며 ‘주제가를 레오나 루이스가 불렀구나. OST 사야겠네’라는 조금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조금 지난 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로버트 저메키스가 오랫동안 실험해왔던 영상 혁명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단 한 번 만에 뛰어넘고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구나. 아.... 이건 재능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실제 인간을 CG로 표현하기 위해 분투했다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인간은 실사로 남겨두고 새로운 외계종족인 ‘나비’를 CG로 표현하여 둘의 조화를 꾀했다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대단히 영리한 선택을 했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깐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작품에 매번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점점 실제 인간다워지고 있는 영화 속 캐릭터가 ‘혐오의 계곡 효과’(Uncanny Valley Effect)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혐오의 계곡 효과란 만화나 로봇의 외형이 인간과 비슷해지는 수준이 일정 정도에 이르면 오히려 혐오감을 주게 된다는 것인데, 로버트 저메키스 영화 속 인물들이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즉, <아바타>의 나비 종족은 인간이 아니므로 애당초 ‘혐오의 계곡 효과’를 거론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아바타>의 줄거리는 수많은 영화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로 흔하다. <모히칸족의 최후> <늑대와 춤을> <라스트 사무라이> <미션> 등등, 그리고 SF 쪽으로 보더라도 <토탈 리콜>같은 영화들. 이렇게 보면 미국의 어느 평론가가 <아바타>를 보고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늑대와 춤을>’이라고 평가한 건 아주 그럴싸해 보이며, 결국 <아바타>는 가상의 판도라 행성에서 펼쳐지는 서부극, 그것도 정통(정의를 사수하는 멋진 백인 보안관 대 나쁜 인디언의 대립)이 아닌 수정 서부극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능력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생각해보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가 대단히 특별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건 아니었다. <타이타닉>의 사랑이야기야말로 가장 진부한 스토리 아니던가. 즉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흔한 이야기를 흔치 않은 이미지에 담아내는, 그것도 단지 기술적 차원에서 눈을 즐겁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끝내 마음을 움직이며 감동을 전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인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며 익숙하지만 결코 비어 있지는 않다. 이것이 제임스 카메론과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차이인 것이다. 최상의 평가를 하자면 이야기와 볼거리가 가장 최고의 수준에서 결합한 것이 바로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인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아바타>의 최대 강점은 시각을 압도하는 비주얼에 있다. 인간들 사이에 있는 CG 캐릭터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아바타>의 기술적 수준은 높다. CG로 창조된 판도라 행성은 인간의 손길이 묻지 않은 지구의 오지를 보는 듯한 기시감을 드러내며 CG 캐릭터들의 표정과 질감은 실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에 펼쳐지는 액션 장면은 보는 이의 심장박동수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거대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조류들이(처음 들어보는 이름인지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리 꽂는 공중전과 다리 여섯 개의 말을 타고 달리는 육상전이 결합된 전투 장면은 마치 내가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듯 생생하며, 특히 인물들이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은 오금이 저리도록 아찔하다.
그런데, 다른 3D 입체영화와 <아바타>가 다른 점은 의도적으로 입체 영화의 장점을 강조할만한 장면들을 극히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보았던 <크리스마스 캐롤>은 시점숏으로 런던 시내를 날아다니는 장면을 자주 보여주고는 했다. 이는 3D 입체 영화의 장점이 ‘이것이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처음 그 장면이 나왔을 때는 ‘헉!’하며 놀라고 경탄하게 되지만, 자주 되풀이 되면서 시들해진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크리스마스 캐롤>은 화면 앞쪽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인물과 눈이 내리는 장면을 자주 활용해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런데 <아바타>는 그러한 기술적 성과를 의도적으로 과시하지 않음으로서 ‘과유불급’의 함정을 잘 비켜가고 있다. 반면 입체를 활용해 자막을 인물들의 위치에 따라 옮겨 다니게 한 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데 상당히 유용했다.
또한 이 영화의 장점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비주얼의 힘에 의한 것이긴 하겠지만, 별도로 논해도 그 아름다움의 깊이는 충분하다. 손을 대면 ‘쏙’하고 줄어드는 식물의 움직임이라든가 특히 밤에 빛을 내는 식물들에 의해 채색된 숲은 너무 황홀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나비라는 외계 종족의 마음도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인간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답고 인간적(!)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환경 생태적 가치관이다. 이 영화 말고도 수많은 영화들이 환경과 생태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의 압도적 비주얼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 메시지는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나비’들은 비록 자신을 위협하는 동물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살생을 금하며, 그렇게 죽은 동물의 생명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고 존중한다. 인간에게 숲은 돈벌이의 대상에 불과하지만, 이들에겐 삶의 터전이요 역사이며 미래이다. 불도저로 숲을 밀어버리려는 인간들에게 ‘나비’족들은 이익 창출을 방해하는 괴물에 불과하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잔혹사를 연상하게 하지만, 특히 환경 생태적 가치관은 더욱 그러하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버팔로로부터 얻었다. 의복과 집은 버팔로의 가죽으로, 음식은 버팔로의 살로, 수렵을 위한 각종 무기는 버팔로의 뼈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므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버팔로는 생명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버팔로는 이들에게 토템의 대상이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무대로 뛰놀던 수천만 마리의 버팔로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몰락과 함께 백인들의 사냥으로 거의 멸종되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백인들에게 쫓기는 원주민들이 말을 타고 도망가다가도 가끔씩 멈춰 서서 뭔가를 기다리다가 다시 도망간다는 것이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백인들이 잡힌 원주민에게 그 이유를 묻자, ‘나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속도를 늦추고 멈춰 선다는 것이다. 이토록 생명과 영혼을 소중하게 여겼던 수백만의 원주민들이 끝없이 영토를 넓히고 개발하려는 침략자들에 의해 사실상 지구에서 소멸해 버린 것이다. 우려스러운 건 이것이 결코 과거 아메리카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가까이는 바로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연일 벌이지고 있는 참상이라는 것이다.
※ 중남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 백인과의 혼혈로라도 살아남은 반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대부분은 사라졌다. 이 차이는 침략자들의 특성에 기인한다. 초기 중남미를 침략한 이들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남성 위주였다. 이들은 섹스를 위해 원주민 여자들은 대부분 살려두었으며, 노동을 위해서도 많은 남성 원주민들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중남미 원주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초기 북아메리카를 침략한 이들은 대부분 종교적 자유를 위해 떠나온 가족 단위의 유럽인들이었다. 종교적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이들은 노동과 성관계가 가족 내에서 해소 가능했으며, 대규모 노동이 필요한 경우에도 저항이 심한 원주민보다는 새롭게 수혈된 온순한 아프리카 흑인들을 선호했다. 이들에게 원주민들이란 그저 죽여도 상관없는 이교도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 좀비 또는 미래의 여전사로 밀라 요보비치만한 배우가 없다면(시고니 위버는 나이로 인해 제외) 현역 특전부대의 여전사로는 미셸 로드리게즈만한 포스를 가진 배우는 없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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