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민족해방투쟁의 충실한 전개... ★★★★
일반적으로 역사적 사건이 영화화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시간 경과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그 사건의 역사적 의의라든가 계급적 관점에서의 이해 등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전형으로 불리기도 하는 ‘알제리 독립’을 다룬 <알제리 전투>는 알제리가 1962년 해방되고 겨우 4년이 지난 1966년에 개봉(1965년 제작)되었다. <알제리 전투>는 이렇듯 조급해 보이는 제작일정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전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현재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알제리 전쟁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극영화가 아닌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형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제리 전투>는 1957년 프랑스 공수부대에 사로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소속의 한 군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고문에 못이긴 이 군인은 결국 FLN 지도자 중 한 명인 오마 알리의 은신처를 말하고, 곧 프랑스 공수부대는 벽 속에 숨어 있는 오마 알리와 그 일행을 포위한 뒤 ‘투항하지 않을 경우 건물을 통째로 날리겠다’는 최후통첩을 한다. 벽 속에 숨어 고심하고 있는 오마 알리의 얼굴이 점차 흐려지면서 영화는 알제리 전쟁이 발발한 1954년으로 되돌아간다.
1954년 알제리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프랑스 군부의 폭탄 공격으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자 FLN 역시 알제리 거주 프랑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탄 테러와 함께 프랑스 경찰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한다. 사태가 악화되자 프랑스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FLN에 대한 본격적인 검거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들이 점조직으로 구성된 FLN을 검거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전이 바로 강압적 심문, 즉 고문이다.
검거된 FLN 지도자에게 프랑스의 한 기자가 공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여자들에게 폭탄이 든 바구니를 운반하도록 해 무고한 생명을 죽인 건 비겁한 행동 아닌가요?” FLN 지도자는 반문한다. “네이팜탄으로 민간 마을을 공격해 수천 명을 죽인 건 더 비겁한 짓이 아닌가요? 비행기가 있다면 우린 훨씬 쉬울 겁니다. 비행기를 주면 바구니를 드리죠” 이 기자회견 직후 프랑스 공수부대의 지휘관이 던진 얘기는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일지도 모른다. 이 지휘관은 작전의 승패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작전의 성공은 정치적 의지의 결과”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알제리 전쟁이 진행되면서 프랑스 내부로부터 알제리 독립에 대한 지지 의견이 높아지는 상황을 경계한 것이다. 이는 전쟁은 단지 무력의 차이에 의해서 승패가 결정 나는 것은 아니라는 냉철한 지적이며, 자국 정부의 잘못된 대외 정책 철회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의 정치적 압력이 중요함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는 입장에서도 면밀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지점인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고, 전쟁 피해가 커지는 상황에서 집권한 드골 대통령은 알제리 독립을 위한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러나 정부의 알제리 독립 방침에 반발한 알제리의 프랑스 주둔 군대는 반 드골 쿠데타 등을 시도하지만 알제리 독립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결국 군부도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게 되고, 알제리는 130여 년에 걸친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1962년 7월 2일 정식으로 독립 국가가 된다.
영화 <알제리 전투>는 1830년 이후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아 온 알제리가 프랑스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벌인 알제리 전투의 경과를 세밀하게 훑어 나간다. 얼핏 이 영화는 사기, 폭력 등의 잡범으로 살아가던 오마 알리가 감옥에서 FLN 지도자의 죽음을 접한 뒤 자각해 민족해방투쟁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인 것만 같다. 그러나 <알제리 전투>는 단지 오마 알리를 포함한 소수의 FLN 지도자의 행적을 쫓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 주인공이 있다면 광주민중항쟁의 주인공이 광주 민중이듯이 바로 알제리 민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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