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놀라운 영화를 본다는 즐거음...★★★★
28년 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한 우주선이 날아든다.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우주선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외계인이 죽어가고 있었고, 정부는 ‘디스트릭트 9’이라는 구역에 외계인을 수용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디스트릭트 9’은 우범지대로 변해가고, 외계인들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진다. 그러자 이들을 관리하고 있는 군수업체 MNU는 멀리 떨어진 곳에 ‘디스트릭트 10’을 건설해 그곳으로 외계인들을 옮기기로 하고, 이 작전의 책임을 실무자인 비커스(샤를토 코플리)에게 맡긴다. 외계인들에게 이주 동의서를 받으러 다니던 비커스는 알 수 없는 외계물질에 노출되고 몸이 점점 외계인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가끔 주위로부터 ‘너는 왜 열심히 영화를 보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영화를 보는 행위가 문화 향유의 한가지라면, 이런 질문은 왜 인간이 문화를 향유하느냐라는 근본적 질문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질문은 왜 연극, 뮤지컬, 노래가 아닌 영화인가라는 의미일 것이다.(물론 나는 노래도, 연극도, 뮤지컬도 나름 즐긴다) 어릴 때 봤던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암튼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좀 애매하다. 그래서 가끔은 최근 본 영화 중 정말 놀랍고도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영화를 예로 들며, 이런 영화를 보고 느끼는 즐거움 때문에 본다는 대답을 할 때가 있다. 예로 드는 영화에 <지구를 지켜라>, <복수는 나의 것>, <밀양> 또는 <판의 미로>, <시간을 달리는 소녀>, <렛 미 인> 등이 있으며, 거기에 <디스트릭트 9>이 추가될 것이다.
그만큼 <디스트릭트 9>은 정말 간만에 영화 본다는 즐거움을 만끽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SF 오락영화로서도 너무 재밌고, 덧붙여 현실 사회와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탐구한다는 점에서도 훌륭하다. 오락성과 사회성 중 어느 하나로 기울지 않고 그 저울추를 절묘하게 맞췄다는 점에서도 역시 훌륭하다. 물론 <디스트릭트 9>에서 보이는 여러 설정들은 여러 영화들이 연상될 정도로(이를테면 <에이리언> <프레데터> <플라이> 등)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곳에 인간의 우화를 담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그래서 결국은 시선을 더욱 확장시키는 영화의 발걸음은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쓰레기로 만든 꽃이 주는 아련한 감동까지도)
자, 이렇게 물어보자. 왜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인가? 수많은 SF영화들의 무대인 뉴욕이나 LA가 아닌 왜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인가? 이 영화의 제목 <디스트릭트 9>은 그 자체로 공중에 떠 있는 SF가 아닌 인간이 현실에 발 딛고 선 영화인 점을 확실히 한다. 많은 영화팬이라면 <디스트릭트 9>이라는 제목에서 우선 <13구역 : 13th District>을 떠올릴 것이다. 파리 교외에 아랍계 주민을 중심으로 이방인, 이주민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13구역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디스트릭트 9>은 실제 남아공에 존재했던 ‘디스트릭트 6’의 직접적 인용이다. 6을 뒤집으면 9가 된다. ‘디스트릭트 6’는 그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인종 분리 정책) 당시 백인들의 안전한 거주를 위해 흑인들을 먼 곳으로 이주시킨 정책의 대표적 이미지다. 그러니깐 영화적으로 ‘디스트릭트’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이방인 거주’ ‘인종차별’ ‘배제’ 등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모큐멘터리) 기법으로 촬영된 화면은 이 영화와 현실이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뉴스 화면과 다양한 인터뷰 화면의 적절한 활용은 관객을 공상(SF)에 빠져들지 않게 하고(?) 계속 현실임을 인식하도록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가끔 어긋나는 부분들이 보이기는 한다. 페이크 다큐 시점으로는 보기 힘든 장면들이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페이크 다큐를 포기하고 일반 극영화 시점으로 전환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디스트릭트 9>의 놀라움은 웬만한 단점은 딱히 집어내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소소하다.
덧붙여 영화에 등장하는 남아공 주민들의 인터뷰 내용은 그 후일담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놀랍다. 영화 속 주민들은 실제 남아공 주민들이고, 이들이 인터뷰에 대답한 내용은 외계인 프런들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남아공의 불법이민자들인 짐바브웨나 나이지리아 이민자를 향한 불평불만이라고 한다. 현실에 대한 반응이 그대로 영화 속 외계인에 대한 반응으로 100% 치환될 정도의 현실성이라니, 이거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만 보면 <디스트릭트 9>은 유럽의 이민 제한 정책을 직접 공격한 <칠드런 오브 맨>의 성과와도 비견될만하다.
어떻게 보면, 남아공 주민들이 외계인들을 내몰고 배제하려는 차별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심오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깐 우리 사회만 하더라도 네팔의 이민자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좋은 직장에 근무한다 하더라도 일종차별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랫동안 백인들로부터 차별과 배제의 아픔을 당한 당사자들이 다른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가슴 아픈 현실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는 그들의 성정 자체가 나쁘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100% 확실한 건 세계의 다수가 굶주리고 있는 현실은 결코 적게 생산되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분배의 문제인 것이다.
※ 그런데 일반적으로 과학과 문화가 발달된 민족이나 국가가 저발달된 국가를 지배함을 고려해볼 때, 어째서 놀라운 과학 기술(외계인 무기를 획득하려는 인간들의 처절하고도 잔인한 경쟁을 보라)을 가지고 있는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지배받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최소한 우주선 안에 있던 무기만 가지고도 쉽게 정복하기 힘든 세력이 됐을 것이다. 이런 의문의 해소를 위해 감독은 외계인의 특성을 소수의 지배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리드하는 집단으로 규정해 놓고, 이들 소수의 리더들이 바이러스 등의 감염으로 느닷없이 죽게 되자, 리더를 잃은 외계인들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우주의 미아로 전락한 것이라는 설정을 해 놓았다. 이 넓은 우주에 다양한 특성의 생명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 쉽게 수긍하기는 어려운 설정이긴 하다. 그게 개미와 같은 곤충이 아니라 고도의 문명을 구축한 듯 보이는 외계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튼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선 이 부분은 그렇다고 인정해 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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