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맞이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지만 결국에는 맞이하게 되어 있는 일이기도 하다. '회자정리 거자필반'(만날 때 떠날 것을 걱정하고, 떠날 때 만날 것을 생각한다)이란 말도 있듯이, 크게 보면 영원한 만남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별이 일찍 오든 늦게 오든 언젠가는 온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누군가와 이별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실현된다 해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오랜 진통을 버티고 마침내 이별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우리를 한뼘 더 자라게 하기도 한다. 사람 일이라는 게 늘 순환되는 것이라, 이미 헤어짐을 겪었다면 그만큼 앞으로 누군가를 만날 일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임을 비로소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당연한 성격을 지녔지만, 관객의 감정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영화에 있어서 이별은 악마적인 장애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어떤 영화는 영원한 동반자의 모습을 통해 해피엔딩을 맺고, 어떤 영화는 영원한 이별을 통해 새드엔딩을 맺는다. 때문에 한편으론 이런 극단적 인식이 '만남은 축복이되, 이별은 형벌이다'라는 생각을 낳기도 한다. 물론 이별은 쓰라린 것이지만 언젠가 겪게 되어 있는 필연적인 일인데 말이다. 이별에 관대할 수 있는 멜로영화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데 영화 <내사랑 내곁에>는 의외로 그랬다. 감독의 전작들을 고려해봤을 때, 이 영화 역시 백년해로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길 줄 알았고, 그래서 이별의 고통을 한껏 자극하며 실컷 울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는 꽤 침착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많이 울지만, 영화는 침착하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종우(김명민)와 장례지도사인 지수(하지원)는 종우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상주와 장례지도사로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에 만난다. 예쁘고 상냥한 지수가 좋은 종우와 자신의 직업에 개의치 않는 종우가 좋은 지수는 힘든 고비가 있을 것을 각오하고 사랑을 만들어나간다. 종우의 치료는 순탄치 않지만, 그래도 그들의 서로의 사랑을 자양분 삼으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낸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언제나 그들 앞에 서 있다. 나아지는 건 기대할 수 없는 종우의 병으로 인해 병원비 지출은 꾸준히 계속되지, 그래서 퇴원해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심지어 병세가 더 악화되어 재입원을 하게 된다. 종우의 몸은 점점 굳어가고, 자신이 지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느낀 종우는 자신을 향한 자책감때문에 반대로 지수를 모질게 대하기 시작한다. 지수는 종우의 이런 모습이 야속하면서도 자신이 곁에 없는 종우의 모습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무너져 떠날 생각도 하지 못한다. 사랑만으론 모든 게 되는 줄 알았는데, 종우와 지수는 점점 지쳐 간다.
기본 줄거리와 예고편에서부터 이미 이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가 결코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예감케 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언제나 배우들의 감정의 바닥까지 경험하게 만드는 듯한 박진표 감독의 저력은 이번 영화에서도 지독한 병과 싸우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곁에서 인내하며 돌보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스멀스멀 기어오는 죽음의 공포에 몸부림치는 종우 역의 김명민은 익히 알려진 대로에 부응하는 메소드 연기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이미 <하얀거탑>에서부터 디테일에 강한 연기자로 알려진 만큼, <내사랑 내곁에>에서도 그의 연기는 루게릭병을 흉내만 내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정말 기아체험하듯 삐쩍 마르고, 사지를 움직이지 못해 기력이 모두 소진한 그의 몸을 보고 있노라면, 멜로영화 본연의 슬픈 감정보다도 불쌍하다거나 대단하다는 느낌이 먼저 오는 게 당연하다. 또한 흔히 영화 속 불치병 환자가 갖고 있는 성격의 클리셰도 최대한 빼고 죽음을 향해 가는 청년의 복잡한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김명민의 극사실주의적 연기는 영화가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데 일조했다.
김명민이야 예전부터 워낙에 기대를 했고 의심치 않았기에 당연히 만족스런 연기였지만, 의외의 발견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원의 연기다. 김명민이 온몸으로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뚜렷히 하는 동안, 하지원은 이 영화가 눈물 늪으로 뒤범벅된 길로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얼핏 보면 밋밋하게 보일 수 있어도,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꽤 인정할 만한 연기였다. 그녀는 숱하게 울긴 하되 종우가 보는 앞에서는 좀체 울지 않는다. 퍼주어도 모자랄 넓고 깊은 사랑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을 돌보는 것이 조건 반사처럼 몸에 배어버린 지친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원은 그렇게 사랑 앞에 자신의 모든 힘을 내주어가며 조금씩 기력을 잃어가고, 분노하고,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여가는 지수의 모습을 과장되지 않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원의 이런 담백한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아도 최루성 소재인데 대놓고 관객을 울리려는 꽤 괘씸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더불어 조연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특히 6인실에서 종우와 함께 기거하는 환자 가족들을 맡은 배우들의 경우, 두 주연배우들만큼의 비중은 아니지만 임하룡, 남능미, 임형준, 손가인 등 배우들은 각자 인상적인 장면 하나씩을 만들어낸다.
사실 박진표 감독의 스타일이라 하면, 목적이 뻔히 보이는 영화라는 데 있다. <죽어도 좋아!>를 통해 노년의 사랑도 불같을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렸고, <너는 내 운명>을 통해 사랑은 실로 숭고하다는 진리를 설파했고, <그 놈 목소리>를 통해 그 사건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었는지를 호소한다. 때문에 박진표 감독의 영화는 목적이 너무 뚜렷해 영화적 발전은 찾아볼 수 없다는 논란(<그 놈 목소리> 때 가장 심하게 불거졌다)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일관된 스타일이 있으니 <내사랑 내곁에> 역시 시놉시스가 공개됐을 때부터 <너는 내 운명>의 뒤를 잇는 지독한 멜로가 될 줄 알았다. 역시 병마 따위는 개의치 않고 숭고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남녀의 이야기만을 그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내사랑 내곁에>는 박진표 감독의 전작들보다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때론 냉정하기까지 하다. 전작들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빛을 잃어선 안될 인간의 위대한 가치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 영화는 현실에 좀 더 집중한다. 인간이 본연의 위대한 가치를 추구하기 힘들게 만드는 그런 현실의 모습에 말이다.
사실 이 영화를 <너는 내 운명>과 일맥상통하는 멜로영화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종우와 지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폭풍전개고, 두 사람이 함께 병마와 싸워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눈물을 쥐어짜지 않는다. 오히려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 가운데 웃음이 배어나오는 에피소드를 틈틈이 집어넣음으로써 눈물의 늪에 빠지려는 순간 담갔던 발을 빼는 식으로 전개한다. 종우의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는 후반부의 전개 또한 관객들의 눈물을 유도하기 위한 절절한 호소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때문에 이 영화를 멜로영화로서 평가한다면 그 설득력은 다소 약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드라마로서 꽤 미덕이 있다. 시작은 종우 한 사람이지만, 이 영화가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내 종우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양상으로 확대된다. 종우가 퇴원했다 병세의 악화로 재입원하여 6인실에서 생활하게 되면서부터 이러한 양상은 한결 뚜렷하게 펼쳐진다.
종우가 있는 6인실의 환자들은 모두가 긍정적 가능성을 찾기 힘든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그저 숨을 놓지 않기 위해 누워 있을 뿐이고, 어떤 이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살아있다는 것 외에는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영화는 언제 끝날지 모를 절망을 지고 있는 이들과 이들을 곁에서 보살피는 사람들의 모습에 적잖은 비중을 주는데 특히 아픈 이들을 보살피는 가족들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의 모습은 그저 헌신하고 희생하는 휴먼다큐멘터리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기다림에 지쳐 분노로 둘러싸인 슬픔때문에 주저앉고 마는 이도 있고, 아내가 잠시 정신이 돌아온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해 자신을 수없이 질책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언제 끝날지 모를 시련이 이젠 지긋지긋해 가족의 숨을 그만 놓아주길 원하는 이도 있다. 이들의 모습은 어떤 가슴 벅찬 휴머니즘적 감동을 주진 못하겠지만, 희망없는 나날을 그래도 붙잡고 견뎌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모습을 꽤 설득력있게 제시함으로써 현실적이고 가슴 먹먹한 감정적 파장을 불러온다. 사실 이 영화가 멜로영화로서 보여주는 매력이 다소 옅은지라, 이 인물들의 에피소드에 시간을 좀 더 투자했더라면 영화가 훨씬 괜찮은 모습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만큼, '남아 있는 자들의 아픔'을 나타내는 이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물론 이 영화가 삶과 죽음에 대해 꽤 유심하게 들여다보는 태도는 종우와 지수의 이야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흔히 영화 속에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이라 하면 앞으로 매 순간이 죽음을 향한 엄숙한 준비가 되겠구나 짐작을 한다. 그러나 <내사랑 내곁에>는 그런 현실 앞에서 의외로 쿨하다. 종우는 얼마 남지 않은 삶 속에서도 자신이 하던 일들에 꾸준히 매진하려 하고, 애인을 만들고 싶어하고, 성생활에 대한 욕망도 드러낸다. 종우와 지수가 병원에서 관계를 갖는 장면도 나올 만큼 말이다. (이 장면은 사실 이 영화가 '12세 관람가'라는 사실이 의아해지는 대목이었다.) 이렇게 예전과 다름 없는 삶의 여러가지 욕망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록키의 말을 인용하자면 '죽기 전까지는 죽은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듯 하다. 죽음은 언젠가 겪게 되어 있는 마지막 관문일 뿐, 그것에 대해 겁내어 위축될 필요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해 최대한 초연하려는 태도는 지수의 직업인 장례지도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일본영화 <굿'바이>에서도 강조된 부분인데, 죽음을 영원하기 때문에 비극적인 이별이 아니라 잠시 헤어질 뿐인 필연적인 이별로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하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 이는 어느 정도 복선이기도 한데, 지수의 직업이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접하는 장례지도사라는 점에서 그녀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사뭇 다를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처음의 그 쿨했던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겁을 내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펼쳐진다. 빤히 보이는 죽음을 앞두고 종우와 지수가 만나게 되는 감정은 여느 최루성 멜로영화에서 보여지는 핑크빛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화를 내고, 서로를 괴롭히기도 하고, 못할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러한 극단적인 감정은 연인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보다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스트레스를 겪는 셈이다. 이로 인해 종우와 지수가 서로에게 내는 생채기는 때론 모질 만큼 아프다. 이것은 멜로영화 본연의 애틋한 눈물을 자아내긴 힘들겠지만, 우리가 예쁘게만 상상했던 소위 '불치병 커플'의 현실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묵직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결국 이 영화는 죽음을 통해 사랑의 위대한 면모를 추켜세우려 하기보다, 사랑을 통해 삶과 죽음의 아프지만 피할 수는 없는 필연성을 지그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사랑 내곁에>라는 제목은 어쩌면 현실에 대한 반어법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어하지만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이 영화 속 인물들처럼 예정된 죽음이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욱 힘든 일이다.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제목에 손발이 꽤 오그라들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이 제목이 가혹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는 동화같은 소원이기에.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앞에 무너져도 자신들의 삶은 버리지 않는다. 시기가 좀 다를 뿐이지, 언젠가는 이를 받아들이고 꿇었던 무릎을 다시 추스르게 된다. 이제 이별을 겪었으니, 앞으로는 만날 일만 기다리면 된다는 듯이 말이다. 끝내 이러한 의지를 버리지 않기에, <내사랑 내곁에>는 슬프기보다 아프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