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종교가 굳이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나 천주교가 전부가 아니지만,)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 즉 11명의 사도와 나중에 추가된 한 명의 사도, 그리고 바울을 위시한 그 외의 사람들의 행적이 담겨있는 책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는 바로 이 사도행전 7장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람은 다름아니라 12사도들에게 뽑힌 믿음 좋은 사람 7명 중 한명이었던 '스데반'이다. 영화의 마지막 크레딧에서 "martyr"라는 단어가 '순교자'뿐만 아니라 '목격자(본 사람)'라는 뜻도 있음을 알려주는데, 이 단어가 목격자라는 뜻을 갖게 된 것도 이 '스데반' 때문인 것 같다. 이유는 바로, 그가 '살아서 천국을 보았던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신약 사도행전 7장 55절). 스데반은 자신이 천국을 보았다고 말하고, 성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다. "martyrs"는,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신념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 할때 'martyr'라는 단어 외에 또한 집고 넘어가야할 내용의 소재는 바로 '죽음'이다. 무색무취의 투명한 물이 한 잔 놓여있고, 누군가 나에게 그 물을 마시라고 강요한다면, 그 물을 입에 가져가기 전에 한가지를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복어의 독(tetrodoxin)도 무색무취의 투명한 액체라는 것. 내가 지금 반드시 마셔야할 이 액체가 물인지 독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난 이 물을 마셔야한다. '투명한 액체'의 비유가 아니라, 칠흑같이 어두운 방안에 들어서는 비유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중요한건, 인간이면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이며, 그것을 기억하던 안하던 간에 그 죽음은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 자체는 재앙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무서워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는다면 그걸로 끝인지 아니면 그 후의 세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도,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갖혀서 모진 고통을 당하다가 피부껍질을 벗겨 죽임을 당하는 소녀가, 도대체 왜, 어느 부분에서 '순교자'라고 불려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면, 그 정답은 바로 이 '죽음 후의 미지(未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왜 달에 착륙하는 비행선의 모습이나, 바다 속을 항해하는 잠수함의 쾌거,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산에 대한 정복욕에 열광하는지는 바로 이 '미지'를 '인류가 극복'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구의 어느 곳도, 우주의 어느 곳도 모두 '보아서' 극복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남은 건 '죽음 그 후'가 아닐까?
하지만 알다시피, 내가 마셔야할 액체가 물인지 독인지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누가 대신 마시면 되고, 이 암흑이 허공인지 바닥이 있는 곳인지는 누군가가 들어가 보면된다. 2차 대전 중 독일군이 유태인과 소수민족을 대리고 생체실험을 통해서 '현대의학'을 발전 시켰던 것 처럼. 인간은, 인간에게 잔인해야, 인간을 구하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죽음 이후'에 대한 발견, 그 실험의 장에 여러명의 사람이 던져지고 그들은 '시험' 및 '실험'을 받는다.
그 시험과 실험의 장에 던져진 여인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고, 이유없이 구타를 당하며, 대소변을 통한 치욕을 당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삶'을 포기한다. 현실에 아무런 미련이 없고, 오히려 고통스러워 '죽음' 이후가 하나의 '천국'으로 다가오게 되면, 눈은 자연스레 '천국'이 있는 하늘로 향해진다. 그 순간, 사람은 무엇을 보게되는가. 삶과 죽음의 강을 지나는 순간에서, 죽음 저편의 모습을 '보고 전하는 이'. 영화는 이를 '순교자'로 지칭한다.
이 영화는 처음 듣는 목소리다
결국 '죽음 이후의 인지'에 대한 실험이 이 영화의 전체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이 영화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단하다'고 칭해져야 할 이유는 바로 감독 '빠스깔 루지에'의 뚝심과 손끝에 있다.
누군가를 가두고 폭행과 고문을 한다는 내용 자체는, 영화가 그것을 '순교'라고 부르던 그렇지 않던 간에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리 유쾌한 내용은 아니다. 바로 '고통' 때문이다. 다른 이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필요한 무엇들, 예를 들면 신념이라던가 의지 등등을 의도적으로 꺾기 위해서, 사람들은 '고통'을 이용해 왔다. 그 고통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 고통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어 분명 무서운 것이다. 그렇기에 온갖 '고통'과 '죽음'을 견디고 신념을 지켜낸 이를 '순교자'라고 부르는 거겠지.
빠스깔 루지에도 사람일터. '고통' 그 자체를 영화에서 아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영화의 전면에 내세우기도 그리 쉽지 않다는 것. 그렇게 만드는 이나 그걸 보는 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고통'만이 있는 영역...은, 어쩌면 공포영화에서도 '사후(死後)'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잔인한, 하지만 더 잔인한
영화는 90여분 간, 너덜한 육체와 가감없는 폭력 등으로 온갖 잔혹함을 선사하지만, 더 잔인한 부분은 바로 마지막, 이 모든 일의 흑막인 한 노파의 자살이다. 그저 단순히 그녀가 '순교자로 부터 전해 들은 다른 세계'의 내용 때문에 자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 영화가 너무 가벼워진다.
전술한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순교자'가 된 것은, 단순히 그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음 자체는 아무런 가치의 가감이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가지는 가치는, 그 죽음을 대하는 자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부여한다. 사도행전의 기록, 그리고 '성경'을 믿었던 수많은 이들의 아낌이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을 터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노파는, 모임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이에게 묻는다. "당신은 죽음 이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상상해 본적이 있느냐?"고. 그렇지 않다고 하자, 노파는 주저없이 입 속에 넣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첫째로, 스스로 영화임을 드러낸다. 이 장면의 등장으로 영화의 한 핵심축을 담당했던 '죽음 후의 세계'가 느닷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 수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순간의 다른세계에 대한 경험과 2시간의 삶을 겪었던 여주인공의 모든 것이 노파의 방아쇠 소리에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남는 것이 있다. '이전까지의 그 모든 일들'. 영화의 아주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온몸의 가죽이 벗겨진 여주인공으로 축약되는 그녀와 그녀 이전의 사람들이 겪은 '그 모든 일들' 그 자체만 남아, 하나의 기둥으로 세워진 기묘한 구조물로 부활한다. 여기서 영화를 만든 '빠스깔 루지에'의 손길이 거칠게 느껴진다. 이건 영화라고, 분연히 외치듯 말이다.
또한 이 장면에서 영화는 둘째로, 스스로 영화임을 포기한다. 전술했듯, '죽음 후의 세계'는 영화의 한 축이다. 그 모든 고통과 잔혹함이 설득력을 갖게 만드는 중요한 기재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는 큰 태생적 딜레마가 있다. 그 '죽음 후의 세계'가 알려지는 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면, 아무리 이 영화의 핵심축이었다해도 영화를 전체적으로 망치게 된다. 소재가 워낙 민감하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지구를 지켜라>)와 실제 외계인이 등장하는 SF영화와의 차이점에서 비슷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영화 <마터스>는, 그 '죽음 후의 세계'를 결코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그것을 알기 위해 극한의 모진 고통을 겪는 인간과, 그 인간에 대해 아무런 인지 없이 고통을 줌으로서 또한 스스로 고통받는 인간 등, 이들의 군상을 제시하게 된다. 쉽게말해 '영화'를 포기하고 '인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노파의 죽음이 '죽음으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러 온 사람과의 대화 가운데서 '죽은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관객, 그리고 '죽음과 그 후', 그리고 이 영화 <마터스>는 바로 '이 노파의 자살'이라는 지점에서, 벌거벗은 듯 대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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