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음식을 좋아한다. 정말 좋은 말 같다. 그러나 영화는 고전에서 나오는 이 글의 폐해를 지적하듯 도시 속에서의 비극을 냉소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이성과의 만남을 누구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여자와 어느 남자의 만남일 것이다. 그런 만남에서 기이한 관계와 더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남은 긍정만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어느 것이나 상대적인 것이다. 만남 옆엔 헤어짐이 있을 것이고 만남을 통해 얻어진 뒤엔 비극적 관계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관계 3인의 관계를 훑어 나간다. 즐거운 듯한, 그리고 다소 해학적일 것 같은 영화는 시작이 그랬을 뿐, 서사가 진행될수록 영화의 진면목을 점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자의 양다리 걸치기는 언젠가 터질 우울한 이야기들의 원인일 뿐이다. 제목 ‘쌍식기(双食记)’는 즐거움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비극을 의미하는 이중적인 언어이다. 이 영화에서 그렇다.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영화의 서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공포를 만들어냈다. 영화 ‘Misery’의 모습처럼 남자에 대한 여성의 폭력이 보이기도 하며, 도망하려는 자의 극도의 불안의식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또한 아내의 차갑고 섬뜩한 얼굴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만큼 영화의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있다. 영화는 누군가의 잘잘못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련한 인간들의 우울한 자화상일 뿐이다. 믿는 자의 배신이 영화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영화는 그것에게만 집중하지 않는다. 속인 자의 실수에게 복수를 한 자의 모습 역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복수의 정당성이나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등의 천편일률적인 주제를 갖고 이 영화는 황해를 건너 온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한 것인지 아님 환상을 사랑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 역시 이 영화는 뼈아프게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갖고 있는 동화 같은 환상을 갖고 사는 도시인들의 비애가 높은 고층빌딩의 아파트에서 적나라하게 보인다. 영화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중심으로 다가온 것인지 모른다. 믿고 싶을 뿐 믿을 수 없는 존재를 우린 갖고 그것에 대해 애착이 아닌 본능적 집착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지 않지만, 그리고 증오하지만 그래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집착은 용서와 사죄를 문제를 넘어 화해가 아닌 파멸로만 가고 있다. 상대의 거짓을 파헤치면서 느끼게 되는 분노가 상대를 옥죌 뿐, 그 어느 것도 행복할 수 없는 증오와 폭력만 난무하게 된다. 마지막에선 잘잘못이 아닌 자기 자신도 용서 못할 한 인간으로 남게 된 아내의 처참한 몰락은 아마도 우리들의 분노와 집착이 낳은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인간은 어쩌면 행복할 수 없는 것들을 부여잡고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조하면서 즐기는 기이한 동물인 것 같다. 증오하는 상대의 파멸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상대의 행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중적인 그 모습. 애정관계에 있는 상대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통제하려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사랑 없이도 붙들고 싶어하는 기묘한 속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린 도시 속에서 점차 괴이하고 흉악스럽게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말로는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흉측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시 속에서 재미있고 아름답게 사는 방법을 모른다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쌍식기의 모습 하나하나는 너무 슬프다. 더욱이 화면 가득 보였던 대도시의 모습은 역시 슬프게 보였다. 우리가 그런 곳에서 살고 있어서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