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표정만으로도 눈물이 흐른다.....★★★★☆
도대체 인물에 대한 극단적 클로즈업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일까?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여러 작품들, 그중에서 <인랜드 엠파이어>라든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인물에 대한 극단적 클로즈업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기 위해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무없는 산>에서의 그것은 무슨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가?
능력이 안 되는 엄마(이수아)는 진(김희연)와 빈(김성희), 두 자매를 고모(김미향)에게 맡겨두고는 돼지 저금통에 돈이 차면 돌아온다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돼지 저금통을 다 채운 아이들에게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은 고모집에서 시골의 할머니에게도 맡겨진다.
<나무없는 산>은 마치 아이들의 표정을 담기 위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첫 장면부터 카메라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진의 얼굴을 화면 가득 담아낸다. 심지어 말하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비추는 대신, 그 말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담아낸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맨 앞에서 한 질문에 답할 차례다. <나무없는 산>에서의 클로즈업은 어떠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것인가? 그건 바로 슬픔이다. 엄마가 아직은 아이들 곁에 남아 있을 때조차도 아이들의 얼굴은 곧 다가올 아픔을 예고하는 듯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눈물이 맺게 한다. 우리(어른들)는 이미 알고 있다. 엄마가 쉽게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진과 빈은 엄마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나간다. 메뚜기를 구워 동네 아이들에게 팔고, 저금통에 더 많은 동전을 넣기 위해 100원짜리를 10원짜리로 바꾸는 것이 그나마 아이들이 생각해낸 엄마가 빨리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다.
엄마가 부재한 아이들의 아픔을 담은 영화로 <아무도 모른다>가 나온 이후 사실 이런 내용의 영화는 더 이상 오를 고지가 없다고 보였다. 그러나 극 사실주의적으로 표현된, 거의 다큐멘터리 같은 <나무없는 산>은 여전히 엄마가 부재한 아이들의 표정에 더 많은 시선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아이들이 그저 간지러운 코를 긁거나, 눈을 찡긋대는 작은 표정 변화만으로도 바라보는 나의 가슴은 울렁울렁대고, 뭉클해진다. 그러다 끝내 통곡하듯 눈물을 쏟아내는 진의 가려진 뒷모습에 내 가슴도 찢어질 듯 아파온다. 카메라는 이런 아이들의 표정을 세밀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조금은 멀찍이 떨어져 관조하듯 담담히 바라만(!) 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파란 하늘을, 숲을, 담벼락에 비친 햇살을 본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모호한 시간 개념도 아이들의 아픔을 더 짙게 만드는 것만 같다. 도시에서 중소도시로, 그러다 끝내 첩첩산중 시골로 떠밀려간 아이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듯 노래를 부르며 산을 내려온다.
“산으로 올라가고 싶어. 산 뒤로 내려오고 싶어. 강에서 헤엄치고 햇볕 쬐고 모두에게 잘하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