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의 공기를 체험한다.. ★★★★
조니 뎁이 갱이라니? 조니 뎁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의 연기력을 믿긴 하지만, 과연 조니 뎁이 맡을 갱은 어떤 이미지일까? 혹시 미스 캐스팅이 되지는 않을까? 이런 우려를 조니 뎁은 처음 화면에 나오는 순간부터 불식시킨다. 그만큼 조니 뎁은 1930년대의 존 딜린저의 환생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퍼블릭 에너미>는 1930년대 공황기를 배경으로 하는 갱스터 무비이자, 멜로드라마이고, 거의 모든 스토리를 실화에 기반해 제작했다고 한다. 존 딜린저가 자신을 잡기 위해 설치한 특별수사본부에 들어가서 분위기를 살피는 장면 같은 것들. 이 장면이 대표하듯 존 딜린저는 매우 대담하고 영리하며 특히 의리가 강하고 자신감에 가득 찬 캐릭터다. 그는 검거를 두려워하는 연인 빌리(마리안 코티아르)의 걱정에 “염려마, 경찰은 항상 우리보다 늦어”라며 예의 그 자신감을 드러낸다.
영화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당시 미국 정부는 존 딜런저를 ‘공공의 적 1호’로 삼아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친다. 그럼에도 검거는 쉽지 않다. 왜일까?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존 딜런저를 공공의 적으로 인식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영웅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 딜린저는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개인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코트를 벗어 인질의 몸에 덮어주는 신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제보는 별로 들어오지 않고 존 딜린저는 대중 속에 연기처럼 스며들며 사라진다. 오히려 대중에게 공공의 적은 우리에게도 그렇듯 존 딜린저같은 갱보다는 당대의 정치가, 행정가, 기업가였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스토리를 가진 영화가 처음인 것도 아닌 만큼 스토리의 독창성이 이 영화를 평가할 기준은 되지 못할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장점이 되어야 할 것은 무미건조함이다. 이런 무미건조함을 견디지 못하는 관객이라면 이는 곧 지루함이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퍼블릭 에너미>의 무미건조함은 고조되는 긴장과 함께 화면에의 몰입을 끊임없이 고양시켜내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특히 이러한 무미건조함은 극사실주의적 화면과 함께 관객이 단지 객체로서 1930년대를 구경하는 것이 아닌, 실제 당시를 체험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한다. 그렇다. 그건 바로 환상이다. 존 딜린저가 처음 빌리를 만나는 식당에서의 빛과 먼지의 흐름이라든가 또는 존 딜린저가 특별수사본부에 들어가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자신의 정보를 체크하는 장면은 마치 내가 그의 뒤를 따라가는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술적으로 어떤 카메라와 어떤 조명기기를 사용해 이런 효과를 얻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 정도로는 노미네이트되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며 긴장감을 느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도 시대와 존이 처한 딜레마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노태우 정부가 펼친 범죄와의 전쟁도 사실은 반정부 세력과의 전쟁으로 변질되었듯이(현재의 준법 의식 강조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이지만) 1930년대 미국 정부가 펼친 범죄와의 전쟁도 실제 그 범인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보다는 단지 가시적 효과를 누리기 위해 대상자가 선정되었으며, 진정한 ‘공공의 적’은 건재했다(했을 것이다)라는 시대로서의 딜레마.
영화에서도 보이듯이 존 딜린저를 잡고 싶어 하는 건 멜빈(크리스찬 베일)을 중심으로 한 경찰들만이 아니라 거대 범죄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존 딜린저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은행 강도들이 기껏해야 수 만 달러를 목숨 걸고 버는 데 반해, 이들은 그저 전화기를 열심히 돌리며 하루에도 수 만 달러라는 수익을 앉아서 벌고 있다. 이른바, 기업형 범죄 조직. 아마도 이들 기업형 범죄 조직과 경찰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일 것이고, 고위급 정치인 또는 행정가와 유착되어 있을 것이다. 범죄 조직이 자신들의 범죄로부터 대중들의 시선을 돌리고, 경찰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존 딜린저는 매우 매력적인 피라미인 것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존 딜린저의 개인적 행동에서 파생되는 딜레마이다. 그의 신사적인 배려와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스타일은 대중들의 환호를 불러오고 이른바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지만, 오히려 그런 스타일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가 인질을 위해 벗어준 코트는 그의 주거지를 추적하는 증거물이 되고, 한 번 믿은 사람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 그의 성향은 그의 검거와 죽음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의미를 배제하더라도 몇 번의 총격전과 쫓고 쫓기는 추격물로서도 이 영화는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총격전 하나 만큼은 거의 예술적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 마이클 만 아니던가. 거기에 덧붙여 이 영화는 멜로물로서도 제 몫을 다한다. 특히 수감되어 있는 빌리를 경찰이 면회하는 장면(난 처음 이 장면이 일종의 사족이라고 생각했다)에서 죽어가던 존의 마지막 말을 전달하는 그 모습은 무미건조하고 냉랭하던 이 영화에 화룡정점처럼 눈물 한 방울을 찍으며 감동적인 피날레를 장식한다. “안녕, 검은 새”
※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어떤 여학생이 “크리스찬 베일은 주연이라면서 맨날 다른 배우한테 밀리는 거 같아”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최근 나온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다.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에게, <터미네이터 4>에선 심지어 신인인 샘 워싱턴에게도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이는 연출 방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크리스찬 베일 정도 되는 배우가 영화를 위해 받쳐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밀양>의 송강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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