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불순한 상상을 하기 마련이다. 현재 삶이 아무리 합법적이고 건전하다 한들, 그 속까지 100% 건전 마인드로 들어찬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법을 거스르는 발칙한 행위나 일상의 쳇바퀴에서 한참 벗어난 일탈을 누구나 한번쯤 지친 삶을 깨우는 얼음물로 가슴 속에 품곤 한다. 물론 대다수는 그러한 상상을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끝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또는 잘 알려진 허구에서) 이런 상상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그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긴 하지만 점점 옹호 세력들을 거느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환상으로 품고 있었던 걸 용감하게 직접 몸으로 보여준, 어떤 '용감한 영웅'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그건 분명히 옳은 게 아닌데도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등장했던 '의적'의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범법자이지만 선량한 시민들을 도와줌으로써 반(反)영웅의 영웅적 측면을 드러냈다고나 할까.
영화 <퍼블릭 에너미> 속 실존 인물인 은행강도 존 딜린저도 영웅까지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악명높은 범죄자이면서도 대중으로부터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꽤 열렬한 관심을 받았던 캐릭터. 전 미국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에 이를 비웃듯 활개치던 이 사람은 누구에겐 적이지만 누구에겐 전설로 남았다. 남자들의 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마이클 만 감독은 여기에 꽤 냉정한 카메라를 들이댄다. 남자의 로망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라 예상했었고 일정부분 적중하는가 싶었지만, 결국 이 영화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걸 한 줄로 요약한다면 '영웅의 환상에서 허우적거렸던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미국 전역이 대공황으로 정신없던 1930년대, 미국 경찰이 사상 첫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만든 '공공의 적 1호'가 나타난다. 그는 바로 은행강도 존 딜린저(조니 뎁). 일당과 함께 시민들의 돈은 놔두고 은행의 돈만 눈 깜짝할 새에 터는 그는 신출귀몰한 행적으로 경찰들을 희롱한다. 여기에 우수한 전적으로 범죄와의 전쟁 팀장으로 부임한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뛰어든다. 고도의 전략으로 존 딜린저를 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한편 존 딜린저는 그 바쁜 와중에도 빌리 프리셰(마리온 코티아르)라는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를 일생의 사랑으로 삼는다. 존 딜린저는 빌리와 함께 끝없는 도피를 하는 듯 싶지만 결국 경찰에 검거된다. 그러나 끝인 줄 알았던 이 사건은, 존 딜린저가 쏜살같이 탈옥을 감행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과연 이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개봉 전부터 카리스마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톱 남자 배우의 격돌로 큰 화제를 모았던 만큼, 영화는 이들이 주고 받는 신경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이들의 연기는 강렬하게 폭발하고 곳곳에서 크게 펀치를 날리는 방식이 아니라, 내면에 끓고 있을 여러 감정들을 최대한 숨겨둔 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벌이는 신경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설적 은행 강도 존 딜린저 역의 조니 뎁은 역시 그의 명성을 확인케 한다. 오랜만에 (직업이 은행 강도이긴 하지만) 매우 멀끔한 모습으로 등장해 아무래도 본인은 나이를 먹을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그는 깔끔한 외모에서 느껴지는 신사적인 이미지와 정확하고 냉철한 이미지를 멋지게 교차시키며 캐릭터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겉으론 그래 보이지 않지만 속에는 온갖 분노와 슬픔, 불안감이 다 담겨져 있을 것 같은 표정의 흐름이 일품이다. 멜빈 퍼비스 역의 크리스찬 베일은 조니 뎁에 비해서는 비중이 좀 적은 편이지만 비영어권 사람들이 들어도 어느 정도 들릴 만한 인상적인 사투리 영어 연기와 더불어 한치도 흐트러짐없는 듯한 겉모습 뒤에 감춰진 나약함을 은은히 드러내며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뽐낸다. 이들과 함께 존 딜린저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도함과 연약함이 공존하는 여인 빌리 역의 마리온 코티아르 역시 이들의 카리스마에 뒤지지 않는 준수한 연기와 이미지로 칙칙할 수도 있었을 영화를 한층 화사하게 만들어준다. 더불어 영화 초반에는 채닝 테이텀이 예상치 못한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해 즐거움을 주었다.
<콜래트럴>부터 본격화된 마이클 만 감독의 HD 카메라 사용이 이번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리얼리티는 여전히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이번 영화는 그 배경이 현재가 아닌 1930년대가 되면서 기묘한 느낌마저 안겨준다. 마치 1930년대로 돌아가 그 당시 사건의 현장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카메라를 들이댄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유명 배우들이 연기를 하지만 카메라가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는 듯 한편으론 집요하다. 숱한 총격 장면과 액션 장면이 나오지만 카메라는 그것을 최대한 극적으로 멋있게 포장하려 하지 않고 여느 촬영자가 돌아다니듯 바쁘게 뒤쫓는다. 그 때문인지 비주얼 면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진 장면은 없더라도 영화적 포장이 배제된 총격 장면과 액션 장면은 더욱 파워풀하게 또는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총을 쓰는 전작들에서 발휘했던 총격전의 파괴력은 이 영화에서 한층 돋보이는 부분이다. 실제 총의 위력보다 영화 속에서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많이 축소된 면이 있게 마련인데 이 영화의 총격 장면에서 그런 축소는 온데간데 없다. 총알이 나올 때마다 팟팟 터지는 불빛은 눈이 부실 지경이고 발사음 또한 중량감이 상당해 관객들도 영화 속 총격전의 아수라장 분위기를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마이클 만 감독은 최근 10여년 간 감독한 대부분의 영화를 '두 남자'의 구도로 이끌어왔다. 멀게는 <히트>부터 출발해서 <인사이더>, <콜래트럴>, <마이애미 바이스> 까지.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 피할 수 없는 대결 구도로 가기도 하고,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을 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우야 어찌됐든 그들은 대개 대립이나 협동의 정도를 넘어선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본인들이 느끼기도 하고 관객들만 느끼기도 한다) <퍼블릭 에너미>도 그런 점에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존과 멜빈이 겉으로 대놓고 동질감을 느끼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정하게 서로 쫓고 쫓길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 걷는 길이 여차저차해 하나의 선으로 절묘하게 겹쳐지는 순간을 보고 있자면, 이것도 결국은 정 반대에서 출발해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된 두 남자의 비극이 아닌가 싶다.
영화 속에서 신출귀몰하게 은행 강도 일을 벌이는 존 딜린저의 활약(?)을 보고 있자면 충분히 멋있다는 탄성이 나올 법하다. 하물며 당대 최고의 헐리웃 남자 배우인 조니 뎁이 이 사람을 연기한다는데 멋있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게 어떻게 보면 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존 딜린저가 멋있게 보인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조니 뎁의 능력일 것이다. 내 생각에 마이클 만 감독은 존 딜린저를 멋있게 그리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렇다고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나 거대 범죄자가 됐다는 점에서 그에게 인간적인 동정표를 던지려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듯 하다. 카메라에 비친 존 딜린저는 가만히 보면, 멋진 반영웅이라기보다 영웅의 늪에 빠진 어리석은 남자의 초상에 가깝다. 그것은 놀랍게도 존 딜린저를 쫓는 멜빈 퍼비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들이 영웅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은 다르다. 존 딜린저는 은행 강도라는 범법행위를 통해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영웅이라기보다 대다수가 불만이 많을 대상에게 보복을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멋진 이미지를 형성하는 반영웅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반영웅은 영웅에 맞서는 악당이 아니라, 영웅과 반대되는 방법을 사용할 뿐이지 추구하고자 하는 이미지는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거침없이 은행 강도 일을 하는 와중에도 존은 고객의 돈은 훔치지 않음으로써, 예쁜 은행원들을 꼭 한 명 씩 데려다 사탕발림같은 말을 건넴으로써,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는 일은 가급적 하지 않음으로써 '이미지 관리'를 한다. 법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서도 대중의 호응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이 국가로부터 별 다른 구제를 받지 못함으로써 서로의 관계가 극도로 소원해져 있던 당시 대공황 시대의 대중의 심리를 국가를 자극하는 일을 함으로써 절묘하게 파고드는 꽤 영리한 전략이다. 존은 이런 대중의 지지를 기대하면서 자신이 저지르는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돈은 털면 그만이고 감옥은 들어갔다가 탈옥하면 그만이다. '쿨한 반영웅'을 향한 환상을 끊임없이 품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대중은 이런 용감한(?) 자에 열광하고 말이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될 수록 예상치 못한(우리는 예상했겠으나 본인은 예상 못했을)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이런 이미지의 허상은 점점 공중으로 흩어져 간다. 캄캄한 미래에 한없이 불안해 하는 애인조차도 '난 아무도 못잡는다. 넌 나와 항상 함께 있을 거다'라면서 붙잡아두던 그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 미래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간다. 한창 활약할 때의 그 당당함과 쿨함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그렇게 외면하려 애썼던 균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환상은 깨지고 현실은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후반부 존이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고전 갱스터물 <맨해튼 멜로드라마>는 곧 전개될 듯한 존의 미래와 겹쳐지며 묘한 동질감을 형성한다. 끝까지 사나이로서의 의리를 강조하지만 영화 속 갱스터 주인공이 향하는 감옥이고 사형대다. 이렇게 그가 품고 있던 반영웅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영화는 낭만적인 갱스터물이 아니라 비정하고 허무주의적인 갱스터물로서 자리매김한다.
이런 몰락은 멜빈에게도 상당부분 적용된다. 매번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존을 잡아들이겠다 장담하지만 허탕만 치기 일쑤고, 적들의 손에 동료를 잃기까지 한다. 거기다 경찰의 수사방식은 은근히 비인간적인 구석도 있어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면까지 보인다. 이렇게 자신감만 가득차면서 정작 눈에 보이는 실적 없이 겉돌던 수사망에 있던 멜빈은 사건이 매듭지어지는 결말에 이르러 의외의 표정을 보여준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면 승패에 따라 환희에 차 있거나 좌절에 휩싸이거나 해야 하는데, 멜빈의 표정은 그저 허탈함 뿐이다. 눈 앞에 쫓던 어떤 대상이 갑자기 증발했을 때 느낄 법한 당혹스러움과 허무함이 그의 표정 속에 담겨 있다. 존과는 달리 악인을 징벌한다는 철저한 '영웅적 노선'을 걸으려 애쓰던 그가 맞이하는 결말은 의외로 쓸쓸하다. 이처럼 영화는 갱스터물이라고 해서 인물들에게 특유의 카리스마나 낭만을 주고 섣불리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환상에 젖어들고 그 환상에 상처 입는 나약한 남자들의 초상을 담담하게 담을 뿐이다. 이들을 담는 HD 카메라는 선명한 만큼 어딘지 비정해 보인다.
결국 마이클 만 감독이 <퍼블릭 에너미>에서 그리는 사나이들의 모습은 사나이들 간의 박력 있는 대결에서 오는 불꽃 튀는 카리스마 그 자체만이 아니다. 그 카리스마가 허상임을 드러내면서 연기처럼 흩어지는 과정까지 그려낸다.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봤을 법한 영웅 또는 반영웅에 대한 환상은 결국 그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사라지게 마련인 허무한 존재임을 영화는 비정할 만큼 냉철하게 보여준다. 어느 활극의 주인공처럼 종횡무진하던 이들도 결국은 허무주의에 휩싸이고, 불안감에 휩싸이고, 죽음으로 향하거나 본래 있던 현실로 되돌아간다. 금방 날아가는 검은 새처럼 이들이 품은 환상은 뚜렷하되 결국은 언제든 공중으로 사라질 연약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퍼블릭 에너미>는 총질이 가득한 갱스터물이면서도 이거 참 씁쓸하게 하는 뒷끝이 신경을 한동안 간지럽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