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로 아주 추웠던 날 낮에 압구정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 내내 뾰루퉁한 표정의 주인공 보영..
작가이기도 하고(지금은 이 잘 안써져서 독촉에 시달리고 있지만..), 아줌마들 대상으로 하는
강좌들의 강사이기도 한 그녀는 이혼한지 1년이 되었다. 만으로 서른아홉살..(굳이 굳이 그녀는 30대라고 말하고 싶다)
그녀는 뭐든 다 마음에 안든다. 곧 재혼한다는 전남편도, 집안을 어질러놓는 초등학생 딸도 맘에 안들고,
이혼한 이후에 자기를 피하는것 같은 동네친구에게는 무지 섭섭하며, 대학동창인 남자의 행동도 신경을 곤두세워서
받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날 보영은 어느 회사의 연수원에 강사로 초청받아 간다. 1박2일이다.
거기에서 국악강사로 온 지정남과 같은 방을 쓰게된다. 정남은 서른 일곱의 이혼녀다..
둘은 그날 저녁내내 거의 밤새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한다.
정남은 구수한 전라도사투리를 쓰고 말도 참 소박하면서도 맛깔스럽게 한다.
이혼한지 4년차인가 5년차인가인 정남은 경험자(?)로서 보영에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들을 한다.
"왜 이혼했어?"하고 보영이 정남에게 묻는다..
"남편이 때려서요.. 우리엄마도 맞고 살았거든요.."라고 정남이 대답한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혼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왜 결혼했어?"하고 또 보영이 정남에게 묻는다.
"왜 결혼했냐구요? 글쎄요.. 내가 왜 결혼했지? 생각이 안나네. 그냥.. 보상이랄까..?
지긋지긋한 집으로부터 탈출하고 싶기도 하고, 그동안 고생했다..라고 하면서 나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건 정확한 영화대사가 아니다. 열흘이 지난 나의 기억에서 나온 것이다. ^^)
"왜 이혼했어요?" 이번에는 정남이 보영에게 묻는다.
"그냥.. 나답게 살고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보영은 대답한다.
그러나 정남은 그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나보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냐는둥, 왜그렇게 솔직하지 못하냐는둥 이제 공격하기
시작한다. 솔직하지 않아서 글도 잘 안써지는것이고 그렇게 더 많이 아프다는 식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둘은 싸우듯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한다. 하지만 보영과 정남.. 두사람은 둘 다 울고 있었다.
소리내서 엉엉엉 우는 이혼5년차인 정남도, 소리없이 눈물을 펑펑펑 쏟는 이혼 1년차인 보영도, 이혼의 아픔을 가진 두사람이
그 아픔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두 사람 모두의 아픔의 무게, 슬픔의 무게는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정남이 보영에게 '서울다마네기'라고 말하면서 솔직하지 않다고 비난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혼의 이유를 다 말하고 다녀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영화에서는 끝까지 이혼의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행복하지 않아.. 하지만 행복하고 싶어"라고 말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영이 솔직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연수원씬은 이 영화의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다. 이 장면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일것이다.
다음날 보영은 그 연수원에서 나와 맡긴 아이를 찾으러 친정으로 간다.
(환한 아침 장면이 나오니까 나는 '휴우 긴 밤이 지나갔네'라고 나도 모르게 속을 말했다 ^^)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런데 집에만 계시지 않고 혼자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버스를 타기도 하고
목적지를 잘도 가신다. 할아버지가 걱정되어서 보영의 딸 예림은 할아버지를 쫓아가보는데, 의외로 잘 가시는것을 보고
신기해한다. 나는 왜 아버지의 이야기를 넣었을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한치앞도 볼 수 없지만 꿋꿋하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아버지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깜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생각도 해보았다.
(실은..감독과의 대화에서 감독님이 직접 설명해주셨는데 잘 기억이 안난다. 딴생각했나..? ^^)
이 영화는 이숙경감독의 실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숙경 감독은 여성학을 공부하고, 여성운동가로서 활동하다가 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영화공부를 하고 첫 장편을
만든 것이 이 영화이다. 실제 본인이 이혼을 하였으며, 이 극중의 시각장애인 아버지, 딸 예림, 반찬가게친구 부부와 딸..은
모두 그녀의 친아버지, 친딸, 동네 이웃이다.
감독은 뭔가 크게 메세지를 전해야하는 목적보다는 그저 본인을 비롯한 뭔가 앞이 막막하다고 생각이 드는 여자들,
상처받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담아내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원에서의 두 여자의 긴 '한풀이'는 그런 맥락으로 보여지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보여주고..
어찌되었든 상황은 막막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보영이 연수원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지금은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하고 싶다고.. 그리고 행복할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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