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싫어하는 미국 관객을 위한 서비스... ★★☆
최근에 본 공포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디센트>와 <REC>다. 두 영화 모두 리드미컬한 연출로 관객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면에서 아주 탁월한 영화였다고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스페인 호러 영화인 <REC>는 <블레어 윗치 프로젝트>와 같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도입해 실제 살육의 현장을 체험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지금도 <REC>를 떠올리면 영화를 보던 당시 극장을 감돌던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곤 한다.
보통 리메이크를 한다고 하면 빠르다고 해도 대게 몇 년이 걸리는 데 반해, <쿼런틴>은 고작 일 년 만에 <REC>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격리를 의미하는 <쿼런틴>은 한국에선 극장 개봉되지 못하고 DVD 시장으로 직행했다. 물론 DVD 시장으로 직행했다는 것 자체가 영화의 수준을 직접적으로 가늠하는 수치는 아닐 것이다. 대표적으로 <28일 후>의 2편인 <28주 후>는 좀비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개했다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극장 개봉되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전편인 <28일 후>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아카데미 영화제를 휩쓴 대니 보일 감독이 직접 연출을 맡을 <28개월 후>는 아마도 극장 개봉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무튼 <쿼런틴>을 보면서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이거 혹시 DVD가 잘못 들어가서 <REC>를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만큼 두 영화는 거의 복제 수준으로 비슷하다. 소방서에서 시작해 신고를 받고 출동한 낡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의 전개와 카메라 앵글까지 비슷하며, 심지어 여배우의 극중 이름인 안젤라까지 동일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도중 느껴지는 긴장감은 <REC>에 비해 <쿼런틴>에선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첫째, 아무리 재밌는 영화라도 두 번 이상 보면 아무래도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에 들어가 처음 맞는 할머니의 공격부터 갑자기 공중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방관이라든가 아이의 갑작스런 좀비로의 돌변 등을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를 더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영화 보는 환경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극장에서 바로 옆에 괴성을 질러대는 여성과 함께 관람한 <REC>와 집에서 혼자 불꺼놓고 TV로 시청하는 <쿼런틴>의 관람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셋째, <REC>가 실제 스페인에서 방송 중인 ‘당신이 잠든 사이에’라는 프로그램의 형식과 아나운서를 그대로 가져와 영화화함으로서 관객에게 현실이라는 기시감을 안겨주었다면 <쿼런틴>은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로 장르 팬들로부터 환호의 대상이 됐던 제니퍼 카펜터라는 알려진 배우를 내세움으로서 현실이라는 기시감을 제거해 버렸고 이는 영화적 긴장감 차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어차피 한국 관객과는 별 상관없는 문제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제 수준으로 리메이크해 놨음에도 몇몇 부분에서 느껴지는 연출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를 테면 <REC>에서 소녀를 찾기 위해 방을 뒤지던 경찰관과 소방관의 등 뒤에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이 카메라 앵글의 끝에 걸리는 순간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면 <쿼런틴>에선 안젤라가 ‘저기 소녀가 있다’며 알려주고 난 다음에 카메라가 돌며 소녀의 모습을 비추는 차이.
또한 확실히 헐리웃에서 리메이크했기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쿼런틴>은 <REC>에 비해 더 많은 피가 흐르고 좀 더 세밀한 분장효과가 제공된다. 또한 개나 쥐의 공격이라든가 감염을 광견병과 연결시키는 설정 등은 원작에 없었던 부분을 새로 추가한 것이다. 특히 스페인 호러의 특징인 오컬트 분위기의 결말을 동물실험과 바이러스 개발이라는 설정으로 바꾼 건 나름 현장성을 반영한 각색의 결과라고 본다. <REC>에 비해 떨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쿼런틴>이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할 영화는 절대 아니다. 원작이 좋으면 중간은 간다고 하든가. 분명 <REC>를 관람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그다지 후회스러운 결정은 아닐 것은 분명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쿼런틴>이 아닌 <REC>를 관람할 것을 권한다. 왜냐면 <쿼런틴>은 자막을 싫어하는 미국 관객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 영화이며 그것도 업그레이드가 아닌 다운그레이드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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