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
그랜 토리노의 엔진 소리를 연상시키는 낮게 그릉거리는 목소리. 손자가 됐건, 손녀가 됐건, 또는 모르는 사람이건 자기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찌푸려지는 양미간과 퉁명스럽게 올라가는 입 꼬리. 방금 아내의 장례식을 치른 한국전 참전용사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을 묘사해보면 이러하다. 늘 불만에 찬 듯 행동하는 그에게 골칫거리가 한꺼번에 두 개나 생겨버렸다. 새파랗게 젊은 신부는 고해성사를 하라며 귀찮게 하고 동네엔 발음도 어려운 아시아의 이민족들이 점점 몰려들고 있다. 월트에게 원하는 것이라곤 그저 남은 생을 귀찮게 남과 얽히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다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찮게 이웃집 몽족(Hmong - 첫 H음이 묵음이라서 흐몽족이 아니라 몽족) 일가와 관계를 맺으며 그는 마지막 소통의 장으로 나선다.
거장이라는 칭호가 전혀 부끄럽지 않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세 가지로 분류한다고 한다. 연출만 할 영화, 출연만 할 영화, 연출도 하고 출연도 할 영화. 이제 80살 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그랜 토리노>는 아마도 마지막 출연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건 나이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표현했듯이 <그랜 토리노>는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유서를 미리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매사에 불평불만이 그득한 노인네, 거기에 인종주의자적 면모까지 보이는 코왈스키가 아시아계 이민족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은 우연히 일어난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 가능해지지만, 어쩌면 그런 소통은 죽기 전에 그가 맞이할 필연과도 같은 과정일지 모른다. 왜냐면 그의 근원을 감싸고도는 죄의식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몽족은 가장 탁월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몽족은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쟁 이후 베트남으로부터 쫓기고, 나중에 미국과 베트남 관계가 정상화되자 미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존재라고 한다. 그러니깐 보수주의자 월트 코왈스키가 반성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대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점으로 인해 코왈스키가 굳이 다른 민족도 아닌 몽족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나, 어쨌거나 그 기저에 깔린 정서는 반성이며, 그 대상엔 살기 위해 자신이 죽인 북한의 소년병도 포함된다.
한편, 영화 속 코왈스키는 리버테리안(libertarian)으로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정체성과 맞아 떨어지며, 아마도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의 얘기로 인식되어지는 듯하다. 리버테리안(libertarian)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라는 입장을 취한다. 조금 단순하긴 해도 미국에서 경제적 자유를 중시하는 리버테리안은 공화당 지지 성향을 보이며, 사회적 자유를 중시하는 리버테리안은 민주당 지지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무당파로 분류되기도 한다는데, 공화당 지지자로 유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 인터뷰에서 ‘군 입대 이후 습관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긴 하나 나는 엄밀히 말해 리버테리안에 가까우며, 특정 정파를 지지하지는 않는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정치적 정체성과 별개로 <그랜 토리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가장 뛰어난 영화는 아니라고 해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장이 강하게 찍힌 영화라는 점은 명백하다. 과거 적군이긴 하지만 소년을 죽인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코왈스키가 <용서 받지 못한 자>를 연상시킨다면, 혈육도 아닌 이웃의 몽족 젊은이와 교감을 나누고 그들을 위해 스스로 결단을 내린다는 점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동일하다.
특히 <그랜 토리노> 이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모쿠슈라’(사랑하는 나의 혈육). 친딸과의 관계는 개선하지 못하면서도 유사 부녀 관계인 매기의 고통을 멈춰주기 위해 산소호흡기를 떼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역시 가족과는 관계가 소원하면서 슈와 타오를 폭력의 위협에서 구해내기 위해 나서는 <그랜 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결단에 의해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유사점을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두 영화 모두 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지는 않으며, <그랜 토리노>에서 반성과 희생은 동전의 양면처럼 코왈스키의 결단을 이끄는 동기가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이 연상되는 영화라고 해서 분위기까지 무겁거나 암울한 건 아니다. 이 영화는 매우 유쾌하고 유머감각이 넘친다. 다른 문화권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오해와 신기함에서 파생되는 유머는 연신 객석을 웃음으로 유도하며, 몽족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코왈스키는 매번 타오의 이름을 틀리게 발음하지만, 아시아계 의사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리는 등 전반적인 균형감도 훌륭하다.(그런데 나는 코왈스키와 타오와의 소통보다는 코왈스키와 슈와의 소통에 더 마음이 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가장 훌륭한 영화로 꼽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80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작품 속에 자신을 녹여내는 장인의 경지를 발휘한다는 것, 그로 인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노인네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 더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생긴다는 것 -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느끼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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