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우드의 고집스런 모습은 과거의 마카로니 서부극에서의 모습관 전혀 달랐습니다. 여자권투선수의 체육관 관장도 그런 모습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나네요. 그런 그가 대했던 세상은 50년대 한국전쟁을 겪었던 시절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는 백인우월의 Town 중심의 세상에만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마찰이 빚었지요. 그의 이웃은 아시아계 (솔직히 어떤 민족인지 모르겠더군요)였고 라틴계가 미국을 자신의 것인냥 휘젓고 다녔고 흑인문화에 취한 미국인이 있었지만 정작 흑인들은 그런 백인을 맞이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폭행만을 일삼았습니다. 그렇다고 아시아계가 그리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진 않았습니다 (일종의 아시아갱단이 나중에 큰 사건이나 문제거리가 되고 마지막까지 가죠). 하지만 백인이라고 주장한 그 역시 폴란드 이민이었으며 백인이라도 이태리계 역시 그 옆에 존재했습니다. 즉 백인이라 해봐야 다 이민계였으며 미국은 그렇고 그렇게 뭉치고 사는 장소였습니다. 일종의 반전이 될 것이지만요. 이런 환경 속에서 영화는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이민계 사회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사는 묘약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과 관계는 앞으로의 한국에게도 많은 것들을 시사합니다. 아니 지금 우린 고집스런 Mr. 왈러스키 혹은 월트 할아버지가 거부했지만 결국 함께 할 것을 결심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당위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을 여는 자세와 용서, 그리고 타인을 위한 분노, 그리고 슬프지만 그의 아름다운 희생 등은 한국인에게도 예사롭게 보이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이 준비해야 할 자세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족이란 존재의 변화입니다. 한국 막장 드라마에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소재 중 하나가 핏줄입니다. 그런데 서구 영화에선 그것들이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상의 반영인 것 같은데 전에 봤던 '포제션'에서 70-80년대 위기가 냉전이란 시기의 생존의 문제가 쟁점 중 하나였다면 지금은 의미없는 핏줄에서 그 누구도 행복을 찾는 것이 현대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젠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란 영화에서도 비슷한 가족 이야기를 봤었는데 열린 마음이 더 이상 핏줄에 기대지 못하고 있는 현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더군요. 이웃사촌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가족의 문제를 한 번 둘러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도 저에겐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