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보내지 못할 장문의 편지...★★★★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영화란 스토리 없이도(?) 어떤 특정 순간의 이미지만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주제로 한 <엘리펀트>라든가, Nirvana의 리더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다룬 <라스트 데이즈>도 그랬고, 우발적인 살인사건을 저지른 소년의 변화를 다룬 <파라노이드 파크>도 마찬가지다. 우연인지 아니면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세 작품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
포틀랜드에 사는 소년 알렉스(게이브 네빈스)는 친구 제라드(제이크 밀러)에게 이끌려, 스케이트 보더들이 직접 만든 공원 ‘파라노이드 파크’를 찾는다. 소년 알렉스의 삶은 온통 고민거리에 싸여 있다. 이혼을 앞둔 부모, 자신이 돌봐야 하는 어린 동생, 섹스를 갈구하는 여자친구. 이 속에서 갈등하던 소년은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파라노이드 파크를 찾은 알렉스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다가 실수로 철도 경비원을 살해하게 된다.
언뜻 스릴리적 외피를 두르고 있는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진실은 사실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이는 어쩌면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다. 친구가 파라노이드 파크에 가자고 하자 알렉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나는 아직 파라노이드 파크에 갈 준비가 안 됐어” 그러자 친구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 대사를 두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안 됐어” “어른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내고보면 내가 언제부터 어른이었는지(또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는지) 애매하지만, 누구에게나 성장은 정도의 차이를 떠나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게 단순히 사춘기적 반항으로 치부될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사랑, 섹스, 또는 누군가와의 이별이라는 과정을 경과하며 외화되기도 한다.
살인을 저지른 알렉스는 이전의 알렉스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고, 다른 세계에 살게 됐으며, 그건 기존의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수순으로 나아간다. 유아기적 관계의 정리. 자신이 한 일을 침묵하고 회피하던 알렉스가 고통을 인정하고 대면하게 되는 건 스스로의 일을 정리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알렉스의 편지 쓰는 모습에서 시작해서 과거와 현재 사이를 숨바꼭질하듯 왕복한다. 알렉스의 편지는 진실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생략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하며, 묻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과정 그 자체는 바로 데미안이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다.
영화는 알렉스의 감정을 말이나 행동대신 알렉스의 텅 빈 얼굴과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형상화시켜 낸다. 알렉스가 불태워버린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장문의 편지, 그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하늘로 날려 보낸,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어린 날들의 초상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