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 그리고 슬픔....★★★★☆
살짝 손만 대도 톡하고 바스라질 것 같은 금발과 야윈 몸매의 12살 소년 오스칼(카레 헤데브란트). 이혼한 부모의 무관심 속에 오스칼은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들에 저항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칼로 애꿎은 나무껍질만 해칠 뿐이다. 친구 한 명 없이 책과 루빅스 큐브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인 소년 앞에 검은 머리,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12살쯤(!) 되는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가 나타나면서 오스칼의 삶에도 왠지 밝은 빛이 드리울 것만 같다. 그러나 이엘리가 이사 오고 나서부터 동네엔 사람을 죽인 후 피를 뽑아가는 흉악 범죄가 발생하고, 오스칼은 이엘리가 뱀파이어임을 알게 된다.
어둠을 뚫고 흩날리는 눈발로 영화는 첫 이미지(!)를 연다. 정적, 침묵, 스산함, 외로움의 정서가 바로 <렛 미 인>의 것이고, 이는 눈 덮인 광활한 벌판, 사람 한 명 찾기 힘든 춥고 긴 밤으로 상징되는 북구 스웨덴의 풍경만 가지고도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사실 <렛 미 인>은 글이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영화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도 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국제영화제(그 중의 하나엔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가 포함되어 있다)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호평을 받았고, 로튼토마토(www.rottentomato.com)에서 이례적으로 100점 만점을 받은 영화. 헐리웃이 <렛 미 인>의 리메이크를 결정하자 대중문화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롤링스톤지>는 “헐리웃이 이 영화를 망치기 전에 빨리 관람하라”고 하소연할 정도로 <렛 미 인>은 아주 특별한 아름다움과 슬픔을 경험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 <렛 미 인>은 아름답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스웨덴 설원을 배경으로 두 주연배우가 담겨진 장면만으로도 아름다움은 사무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는 거의 진공 상태인 것처럼 느껴진다. 움직임은 있으나 소리는 없다. 때때로 카메라는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한 오스칼과 이엘리의 표정을 세밀하게 담아냄으로써 말보다 몇 배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오스칼이 이엘리의 충고를 받아 들여 자신을 괴롭히는 3인방에 저항하는 장면을 돌이켜보면, 한 무리의 학생과 선생은 꽁꽁 얼어붙은 시체를 발견하고, 오스칼은 위협을 당하고 있다. 오스칼이 휘두른 막대기에 맞은 소년이 아픔을 호소하는 소리 외의 모든 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실제로 발생했을 다른 소리가 삽입되어 있다면 그 장면은 부산스럽고 영화의 아름다움은 산산이 깨져버렸으리라.
이 장면 하나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소리는 지극이 제한된 한계 내에서만 작동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되어 나타난다. 대화도 가장 핵심적인 단어 위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가급적 자제된다. 압도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침묵과 정적. 이 침묵과 정적은 바로 오스칼과 이엘리가 느끼는 외로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음소거를 하고 영화를 봐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복수장면에서 침묵과 정적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물속에 잠겨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오스칼의 먹먹함이 그대로 전달되도록 모든 소리가 제거된 가운데 목과 팔이 잘려나가는 복수 장면은 잔혹하기보다는 처연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 침묵과 정적 사이로 소박하게 울려 퍼지는 단순한 건반악기 소리는 침묵을 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든다.
뱀파이어 호러 영화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CG와 격렬한 액션, 귀청을 때리는 하드코어 음악은 <렛 미 인>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반헬싱> <언더월드>의 영화 속 뱀파이어가 펼치는 멋진 액션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 관람을 포기하길 권한다. <렛 미 인>은 뱀파이어 호러 영화가 아니라 소년, 소녀의 성장 드라마이며, 아름답고도 슬픈 한 편의 동화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액션이 배제된 <렛 미 인>에서 남은 건 외로운 두 소년, 소녀의 애틋함이고 이는 관객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공포나 호러 영화가 모두 ‘무섭다’는 감정만 전달하는 건 아니다. <판의 미로>와 <오퍼나지-비밀의 계단>에서 진한 슬픔을 느낄 수 있듯이,(묘하게도 <판의 미로>의 오필리아와 <렛 미 인>의 이엘리는 외모와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렛 미 인>을 받치고 있는 또 다른 정서는 ‘슬픔’이다. 우리가 <렛 미 인>에서 슬픔을 느낀다고 하면 그건 이엘리를 사랑하는 오스칼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이미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엘리와 함께 이사 온 나이든 남자는 영화에서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분명 오스칼의 미래일 것이다. 사랑하는 두 연인 중 한 명은 세월을 따라 늙고, 또 한 명은 12살에 멈춰져 있는 비극. 늙어버린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과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의 충돌 속에서 저항하기 어려운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죽을 수 있도록 염산을 준비한 채로. 그러면서 그는 연인이 새로운 사람 - 자신을 대체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렛 미 인>에서의 뱀파이어는 사람의 조력 없이는 생활하기 힘든 존재로 그려져 있다. 늙은 연인은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함을 알지만, 사랑을 잃는다는 생각에 슬퍼진다. “내일은 그 소년을 안 만났으면 해” -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나가면서 이엘리에게 이 말을 하는 늙은 연인의 표정엔 쓸쓸함이 묻어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약한 소년 오스칼과 강한 소녀 이엘리는 모든 면에서 상반된다. 누구냐고 묻는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말한다. “나는 너야. 잠깐만이라도 내가 되어봐”. 이엘리가 떠난 빈 방을 맴돌던 오스칼은 얼어붙은 유리창에 손을 대본다. 손을 떼는 순간 손의 흔적은 사라진다. 어쩌면 오스칼의 용기를 일깨워주고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이엘리는 오스칼이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일지 모른다. 또는 그렇게 되고픈 오스칼의 상상 속 분신. 그래서일까? <렛 미 인>의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않으면 인간의 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 이건 반대로 표현하면 오스칼의 세계에선 오스칼이 전지전능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들어가도 되니?”라고 묻는 이엘리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는 오스칼의 공간에 들어선 이엘리는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오스칼은 급히 그녀를 안으며 초대를 한다. 오스칼을 위한 이엘리의 목숨을 건 사랑은 처절한 복수극, 그리고 끝내는 슬픔이 기다릴 긴 동행으로 이어진다.
※ <렛 미 인>은 중앙시네마와 일부 CGV에서 개봉 중이다. 유럽영화라든가 흥행성보다는 작품성이 돋보이는 영화를 보러갈 때는 가급적 대형 멀티플렉스를 기피하는 편이다. 그런데, 중앙시네마에 적당한 관람 시간을 찾기가 힘들어 용산 CGV로 보러 갔다. 결과는 역시 이런(!) 영화는 멀티플렉스보다는 예술전용극장이나 작은 규모의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래도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은 상대적으로 좀 시끄럽고, 관람 도중 출입하는 경우도 많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퇴장하느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을 가리는 등 관람 방해 행동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문화 형성에 일조하는 건 바로 멀티플렉스이다. 도대체 영화가 시작한지 30분이나 지났는데도 늦게 온 관객의 출입을 허용하는 것도 그렇고, 끝나자마자 불을 켜고 문을 활짝 열며, 심지어 관객이 계속 앉아 있는데도 청소를 시작함으로서 사실상 반 강제적으로 관객을 내쫓는다. 주로는 흥행성 있는 영화만 상영하는 CGV에서 가끔 무비꼴라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작품성 있는 영화를 상영하는 건 관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영화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차원에서 환영할만하지만, 최소한 무비꼴라쥬 상영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방식으로 운영할 수는 없는 것일까.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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