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꾸밀 시간에 시나리오나 다듬지 그랬어... ★★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인 해명(박해일)은 친일파인 아버지의 재산 덕에 마음껏 삶을 즐기며 당대의 멋쟁이로 살아간다. 총독부에서 같이 근무하게 된 동경대 동창 일본인 검사 신스케(김남길)와 함께 술집에 간 해명은 무대에서 춤을 추는 난실(김혜수)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신스케의 힘을 빌어 난실과 단독으로 만난 해명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지만, 난실이 싸준 도시락이 총독부에서 폭발하고 난 후 그녀마저 사라져버려 크게 당황한다. 해명은 난실을 찾아 곳곳을 헤매면서 그녀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된다.
난실을 본 해명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 자신의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사랑한다는 기본 전제부터가 - 그것도 고뇌의 과정도 별로 보이지 않은 채 - 무리라고는 생각되지만,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주자. 그런 영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극중 김혜수가 그럴 정도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느냐이다. 한국 여배우 중에서 거의 독보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김혜수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마치 조카 박해일이 이모 김혜수를 좋아하는 것만 같아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김혜수가 좀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튼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너그럽게 인정해주자.
어쨌거나 영화는 시종일관 구멍이 뻥뻥 뚫린 듯한 허술함으로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어이가 없어서. 우선 엄청난 거사를 앞둔 난실이 자신의 비밀이 밝혀질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대체 왜 클럽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지부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클럽에서의 활동이 거사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포섭해야 된다든가 하는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다. 혹은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것도 아니다. 그건 해명이 난실을 보고 반해야 하는 장소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 부분은 해명이 난실의 정체와 계획을 알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난실이 무대 뒤에서 노래 부르는 이유는 최종 거사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데(또는 원래 난실의 직업이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었고, 그것을 이용해 거사를 계획했든가, 아무튼)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의 노래를 대중 앞에서는 자제해야 되는 것이다. 클럽에 왔던 사람들 중에서 여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해명처럼 난실을 떠올리는 사람이 없었을까? 그리고 총독부 ‘러브벤또’ 폭파 사고 역시 이해 안 되긴 마찬가지다. 만약 독립군이 승전 기념일에 거사를 해야 한다면 가급적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서 경계를 늦추어야 한다. 그런데 거사를 앞두고 총독부 내에 폭탄을 터뜨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기를 자초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다니, 동료 독립단원의 말대로 “요즘 대체 뭐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해명이 일본 경찰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할 때 신스케 검사는 이미 조난실의 정체부터 승전 기념일에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일본 경찰은 조난실에 대해 감시와 미행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그랬다면 해명이 아무 것도 모르는, 그저 사랑에 빠진 모던보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난실을 감시하고 미행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면서 조난실을 잡지 않는 건 남편인 ‘테러 박’(너무 안일한 작명법이라고 생각지 않니?)을 검거하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왜 조난실 사촌 오빠는 무자비하게 고문을 했을까? 테러 박이 눈치 채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일개 공무원인 해명도 쉽게 찾는 난실을 테러 비상 경계령이 발동되어있을 일본 경찰이 찾지 못한다는 것도 난센스다. 대체 이 영화의 스토리에서 맞아 떨어지는 부분을 발견한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아무리 반일 혐의자라 해도 신문에까지 실릴 정도인 친일파의 거두 아들이며 총독부 1급 서기관을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잡아다 무자비하게 고문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독립군들의 행태도 묘하다. 친일파의 거두를 찾아와 정중하게 독립 자금을 요청하고 거절하자 조용하게 나간다는 것도 우습고 난실을 찾아온 해명을 스파이라며 윽박지르는 장면에서도 난실과 미스터 리가 나서 자기들을 도와주는 같은 편이라고 확인해 주는 데도 믿을 수 없다며 처형을 강행하려는 것도 도대체 말이 안 된다. 물론 해명의 집을 싹쓸이해 가고 이해명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옷까지 입고 있는 그들이 해명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것 자체부터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천황이 앉아 있는 삼엄한 식장에서 해명이 천황 코앞까지 진출하도록 아무도 제지하지 않더니, 난실이 노래 부르는 장소에도 쉽게 들어간다. 게다가 마지막에 감정 이입 안 되는 신파극이라니. 하나하나 집어 내자면 이것 말고도 많다. 최근에 본 한국 영화 중 이렇게까지 스토리가 허술한 영화를 보지 못한 것 같다. 개봉 시기까지 늦춰가며 정지우 감독이 직접 장시간 편집을 했다고 하더니 보통 이런 경우를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표현하고는 하지만, 스토리 자체에 워낙 허술한 부분이 많아서 편집을 아무리 오래한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즉, 처음 시나리오부터 기본적인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오래 전 경성의 모습을 기막히게 재현해냈다는 것에 있다. 숭례문, 경성역, 총독부, 명동성당 등 오래 전 서울의 모습이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보여질 때 어쩌면 일종의 판타지 공간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거기에 해명과 난실이 사랑을 나눌 때의 부드러운 빛과 화면톤도 꽤 인상적이다. 그런데 워낙 스토리가 부실하다보니 그런 장점들까지도 비꼬게 만든다. “저런 거 만들 시간에 시나리오나 다듬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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