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란 대게는 해피엔드가 아니다... ★★★★
‘엉뚱한 첫 만남. 내 휴지통 속으로 그 남자가 들어왔다’는 표현이 들어있는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면 이 영화가 마치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제목부터 시작해서 켄 로치라는 감독 이름을 보면 일단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빵과 장미>. 당연하게도 빵은 먹을 것, 생계를 의미하고, 장미는 생계 이외의 인권이라든가 인간으로서의 권리, 문화 향유 등을 의미한다. <빵과 장미>에서 켄 로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는 빵뿐 아니라 장미도 원한다”로 소리 높여 외친다.
<빵과 장미>는 주로 영국의 노동자와 하층 민중들의 얘기를 해 온 켄 로치 감독이 영국을 벗어나 세계 최대 노동시장인 미국의 노동 시스템에 대해 제출한 직접적인 보고서라고 할만하다. 잠깐 켄 로치 영화의 주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그의 영화는 대부분 일반인 출연자들로 구성된다. 다만 핵심 인물 한 두 명만 기존 배우를 기용하는데, 이 영화에서 그 역할은 애드리안 브로디다. 그리고 켄 로치 감독은 시나리오를 배우에게 당일 현장에서 촬영 직전에 준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노리는(?) 건 준비되지 않은 살아 있는 현장감이고, 대체 어떻게 배우를 조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 연기자들부터 일반인들까지 현실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는 걸 보면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평가해줄만하다.
아무튼 애드리안 브로디가 맡은 노조 지도자 샘은 영화에서 “82년 청소부의 시간당 임금은 8.5달러였고 의료보험에 가입이 됐다. 그런데 99년 청소부의 시간당 임금은 5.75달러에 아무런 보험혜택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의아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조건은 좋아진 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물가 인상 등을 고려하지 않고서라도 미국의 자본가들은 미국의 최빈곤층으로부터 20년 동안 수천억에 달하는 막대한 거금을 가로채 왔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시스템이 가능한 것인가? 그건 바로 기존 노동자들을 대체한 새로운 노동자들이 미국에 밀입국한 불법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체노동, 파견노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유연한 노동시장은 정확하게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마야지만 관객의 마음은 마야의 언니 로사에게로 기운다. 처음 관객은 로사가 노조 활동에 반대하고 심지어 간부로 임명받는 대신 적극 활동가들을 고발하자 로사야말로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노동자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당뇨로 치료가 급한데도 불구하고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집안 식구를 먹여 살리고 동생 마야를 취직시키기 위해 중간관리자에게 몸까지 내준 사실을 알고는 그저 가슴이 먹먹해 진다. 중간관리자는 로사의 몸을 취하고서도 마야의 첫 월급까지 착복해간다. 어떻게 보면 생계가 급한 노동자가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원하는 게 ‘너무 앞서나간 주장’ 또는 ‘상대적으로 사치스러운 주장’이라고 매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원하는 ‘장미’는 인간으로서 존중 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도식적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던 영화는 ‘단결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했다’는 식의 전형적 결말을 내지 않는다. 청소부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임금인상이라는 과실을 얻어내지만 그 주인공인 마야는 멕시코로 강제 추방된다. 켄 로치는 다양한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가 ‘단기적으로 보면 절망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표명하고는 한다. 멕시코로 추방되는 마야의 모습에 바로 켄 로치의 주장이 담겨 있다. 현실은 대게는 해피엔드가 아니라 절망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 예전에 봤던 이 영화에 대해 최근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빵과 장미>의 시나리오가 현실성을 얻게 된 것에는 켄 로치 감독의 단짝으로 각본을 담당하는 폴 래버티가 6년 동안 실제 LA 청소부들의 운동에 동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빵과 장미> 촬영이 끝나자 영화에 출연했던 실제 청소부들을 중심으로 노동조건을 주장하는 거리시위가 일어났고, 3년간 25%의 임금인상 조건을 얻어냈다. 그러자 이를 본 LA의 호텔 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서 같은 성과를 얻어 냈다고 한다. 영화에 출연했던 청소부인 마이론 파예스는 “영화가 내 삶을 변화시켰다”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게 영화의 힘일 것이다.
※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새로 들어온 마야에게 동료 청소부가 한 말이었다. “투명인간의 법칙이란 게 있어. 청소부 유니폼을 입으면 우리는 투명인간이 되지” - 아마 나도 그들을 투명인간 대하듯 대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