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 자신도 가해자인 건 아닌지... ★★★☆
<노스 컨츄리>의 이야기 전개는 매우 전형적이다. 그것이 남녀 문제이건, 장애인 문제이건, 또는 다른 사회문제이건 간에 가해자에게 저항하는 고립된 주인공이 있고, 피해를 입는 입장임에도 눈치를 보며 같은 편이 되기를 기피하거나 오히려 가해자 편에 서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물론 대체적으로 헐리웃 영화는 매우 감상적이고 우호적이며 긍정적인 결론을 맺으며, 그것이 대중영화로서의 코드엔 확실히 적합한 측면이 있다.
<노스 컨츄리>의 주인공 조시 에임스(샤를리즈 테론)는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아이들과 먹고 살기 위해 철광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광부로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녀에게 일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온갖 성적 희롱과 추태,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남성 동료들의 태도다. 조합간부들조차 여성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대립하는 같은 노동자로서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얼마되지 않은 밥그릇을 빼으려고 하는 적으로 인식하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선을 긋는다. 그녀는 아이들과 살기 위해 저항하지만 그런 저항은 더 큰 폭력으로 되돌아오고 그녀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여성광부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태도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겪게 되는 태도의 객관화이다. 한국 남성들이라면 대부분 가게 되는 군대. 만약에 구타를 당했다는 소원수리가 들어오면 다들 욕을 한다. 가해자에게? 아니 피해자에게!!! ‘왜 쓸데없는 일을 해서 사람 귀찮게 하냐’ 그리고선 대부분 가해자를 편든다. 가해자에게 처벌이 따르지만, 소원수리를 써낸 피해자도 다른 부대로 옮겨지고 새로운 부대에서 그는 철저한 왕따 신세가 된다. 직장에선 좀 달라질까? 내 문제가 아니라면 침묵하기 일쑤고, 내 문제라고해도 혹시 내가 피해 입을까봐 목소리 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얼마나 정확한지 감탄해 마지않는다.
한국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노조에 있다는 얘기가 있다.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조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비협조적이고 심지어 해결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움켜쥔 밥그릇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들은 가해자 편에 서거나 침묵이라는 편한 길을 택한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한 한국 노동운동은 또 급격하게 조합주의로 기울어져 버렸다.
조시에게는 몇 중의 억압이 가중된다. 직장 남성 동료들의 성적 억압과 이를 모른 체하고 모든 게 딸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존재. 가족들에게 조차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그녀의 미모와 문제가 있던 과거가 현재의 모든 것을 규정짓는 다는 것이다. 그녀가 직장에서 당한 폭력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과거가 재판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대한 요소로 작용하고, 강간 피해자인 그녀는 마치 ‘창녀’처럼 다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잔인하다. 집요하리만치 자행되는 남성들의 공격, 그리고 피해자들의 침묵, 조시에게는 단 한 명의 동조자도 없다. 피해자를 구석으로 밀어 넣고 이에 분노하는 관객의 심정을 모아, 감상적으로 마무리하는 해피엔딩은 그래서 전형적이긴 하지만 매우 감동적이다. 1984년 미국에서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승소 사건인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사건’을 영화화한 <노스 컨츄리>는 20년이 넘은 현재,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엔 여전히 의미가 있음을 말해준다. 무슨 말일까? 대대적으로 보도된 성추행의 가해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나라. 정당에 상관없이 국회의원 동료들이 ‘남자라면 그런 실수를 하기도 한다’며 옹호해주는 나라. 그 피해자가 한국에서 최고 크다는 언론사의 기자인데도 이러니 다른 직업의 여성이라면 제대로 알려지기나 했을까. 정말 할 말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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