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한 몸부림.. 그 위에 겹쳐지는 나의 얼굴... ★★☆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 나치, 유태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이런 단어들과 함께 떠오르는 영화들은 얼핏 생각해봐도 꽤나 많다. <쉰들러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안네의 일기>... 대게 이런 영화들을 생각하면서 회색빛을 떠올리게 되는 건 단지 이미지의 색채화만이 아니라, 실제 영화의 색깔에서 기인한다. 가스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그리고 죽어가는 그 회색빛 얼굴들. 기존의 2차 대전 당시 독일 수용소를 다룬 영화와 비교해본다면 <카운터페이터>는 회색이기보다는 좀 더 하얀색에 가까운 것 같다. 그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이 영화엔 별로 많이 느껴지지 않는다.
1946년 베를린. 유태인인 살로몬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는 국제적인 위폐 제조 기술자다. 예술 학교를 졸업했고,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그는 돈이 된다면 어떤 위조 행위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일종의 냉소주의자다. ‘예술을 해서 돈 버느니, 직접 돈을 만드는 게 편하다’ 첫 번째 수용소에서 살로몬의 재능은 간부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배를 불리게 해주고, 본격적인 위조지폐 사업에 가담하게 되는 두 번째 수용소에선 그의 목숨을 지탱해주는 동아줄이 된다.
<카운터페이터>에서 그려지는 위조지폐 작전은 독일군에 의해 실제 실시된 작전이라고 한다. 나치 장교였던 베른하르트 크루거는 유대인을 차출해서 영국 국고의 4배에 달하는 가짜 파운드를 찍어내 전시 영국 경제를 뒤흔들었고, ‘베른하르트 작전’이라고 명명되었다. 영화의 긴장은 살로몬이 베른하르트 작전에 투입되고 반 나치 의식으로 무장한 브루거가 이 팀에 들어오면서부터 높아진다. 브루거는 ‘죽는 한이 있어도 독일의 작전을 도울 수는 없다’며 미 달러화의 위폐작업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킨다. 살로몬은 이런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브루거를 고자질할 정도의 배신자는 아니다. 그러나 점차 옥죄어오는 독일군의 강요에 고심은 깊어만 가고, 호흡은 빨라진다.
<카운터페이터>는 전반적으로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를 그린 영화로서는 꽤나 평이한 편이다. 극적인 긴장감의 고조도 별로 느끼기 힘들고, 위기감도 상대적으로 덜하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살로몬이 죽지 않았음과 이들의 목숨은 스스로의 재능에 저당 잡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인간의 절절한 고뇌가 강하게 부각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선 영화를 보는 내내 살로몬에 겹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고, 게운하지 않았다. 왜냐면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우리 역사의 정서로는 끝까지 저항하다 죽는 독립군의 위대함이 우리의 지향이여야 하고, <카운터페이터>의 브루거야 말로 이상적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브루거가 아닌 살로몬에게 감정이 이입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브루거가 조금만 타협한다면 다 같이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의 정서까지 일었다. 신념이라든가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에 대해 눈을 감을 만큼 나도 충분히 기성 세대화된 것일까. 사람이란 이상하게 자신이 감추고픈 모습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더 외면하게 되거나 타인보다 더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차원에서 이 영화는 참 기분 나쁜 영화다. 특히 브루거의 의도적 태업으로 인한 독일군의 작전 실패가 마치 그 작업에 동원된 모든 유대인의 작전 내지는 암묵적 동의 하에 이루어진 것 같은 후세의 평가는 그런 찝찝함을 더 가중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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