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를 본 건 작년이었다. 극장에서 본 것도 아니고, 집에서 컴퓨터로 보면서 감동을 한 백 사발은 먹었더랬다. 그후로 한동안 나도 모르게 '임진강'을 흥얼거렸고 친구가 보내 준 '경자'의 사진을 수시로 들여다 봤다. 그리고 1년. '박치기-love & peace'(love & peace)가 서울에서 단관 개봉했다. 나는 개봉 한 달여 만인 오늘에야 겨우 극장을 찾았다. 그런데...
극장엔, 나와 할머니 두 분 그리고 뒷자리 일본인 커플이 전부였다. 그 시간 시네콰논은 명동에서 가장 한적한 공간이었을 게다. 수다와 발길질과 핸드폰 벨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오롯히 영화에 빠질 수 있는 얼마나 좋은 찬스인가! 하지만 2시간동안 나는 다이빙 자세만 취하다 나왔다. 영화는 결코 내가 빠져드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박치기' 전편의 미덕은 '소통'이었다. 일본인이 되지 못하고 조센진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재일조선인의 삶. 그걸 어찌 쉬 공감할 수 있겠는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우리'가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감독은 고등학생들의 좌충우돌 성장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짝사랑, 로맨스, 치기어린 싸움과 성장통. 어떤 언어로 표현되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가볍지만 쉬웠고 쉬웠기에 더 깊게 소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단지 개천을 건너는 행위만으로도 남과 북, 한반도와 일본, 인간과 인간의 경계에 화해의 물길을 틀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에 포섭당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건 사랑뿐이라는 뚜렷한 메시지가 그렇게 가슴을 울릴 수 있었다.
고등학생의 로맨스, 우정 그리고 음악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love & peace'는 소통하지 못했다. 분명 한 발 더 나아갔으나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고등학생이던 '안성'과 '경자'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버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더 이상 철없고 단순무지한 꿈만을 꿔서는 안 되기 때문일지도. 북한에 돌아가길 포기한 안성과 성공(혹은 복수)을 위해 원치않는 '사랑'을 하는 경자. 분명 전편의 그들과 지금의 그들은 서로 간극이 크다. 옆 학교 학생들과 싸움질이나 하던 안성도 가장이 되었으니 냉혹한 현실과 차별에 맞닥드릴 수 밖에 없을 터. 차별받는 현실에 분노할 것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증오할 것이고 결국 조선인이기에 체념할 것이다. 경자도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첫사랑의 어려움에 견줄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약 영화가 여기에 초점을 두었다면, 그래서 이야기가 진지하고 어렵기만 했더라면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소통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른 묵직한 감동을 얻었을 것이다. 어릴 적 꿈꾸던 달콤한 미래가 훗날 어른이 되면 잿빛 현실로 탈색되어 버리듯 성인이 된다는 것은 뭔가 알 수 없는 복잡함과 무게감, 그리고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 아닌가. 그리고 이 또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하지만 영화는 아직도 싸움질로 분노를 달래는 안성처럼 철이 덜 든 것만 같다. 진지함과 발랄함, 슬픔과 유머 사이에서 영화는 그야말로 좌충우돌한다.
안성의 오열.
전편의 발랄함을 이어가려는 듯 시종 웃음을 유발하려 애쓰지만 실패한다. 등장인물 모두가 유쾌한 입심을 발휘하고 일본 특유의 얼빵한 캐릭터가 등장해 이곳저곳에서 슬랩스틱을 연발하지만 솔직히 말해 별로 안 웃긴다. 웃기지 못하고 자꾸만 튀고 걸린다. 마찬가지로 슬픈만한 부분에서 안 슬픈 이유도 웃길만한 것들이 안 웃긴 이유와 비슷하다. 안성의 아들이 근육수축증에 걸렸다는 설정은 이 영화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다른 것들과 화합하지 못한다. 난데없이 작렬하는 슬랩스틱만큼이나 갑자기 폭발하는 눈물과 오열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씬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 첫 시사회장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일본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며 우는 경자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니가 그 말 하는 게 더 이해가 안가네'.
얼빵해서 가장 재미있는 캐릭터 사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전 수상과 이름이 같아 '노벨'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근육수축증에 걸린 아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안성
영화를 보는 내내 어느 장단에 감정을 맞춰야 할지 난감했다. 카타르시스라는 건 점증하는 어떤 감정의 끄트머리에서 배출되는 것이다. 이야기의 일관성이 필요하고 감정선의 섬세한 통제가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 'love & peace'의 감정선은 들쑥날쑥한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더 혼란을 일으킨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액자식으로 연출한 시도는 좋았으나 이야기의 어느 쪽도 감정적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제주 4.3’과 서북청년단, 일제강점기의 정신대 동원과 강제징병 등 여러 정치적 사건들도 언급되지만 그저 언급될 뿐 전체 극과는 상관없거나 별개의 문제처럼 보인다. 간간이 재일조선인들의 대화 속에서 일본인에 대한 냉소나 조롱으로 표현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한다.
안성의 아버지 진성 역에 한국배우인 송창의가 캐스팅됐다. 2차대전 말, 제주도에서 탈출해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을 연기한다. 그 외에도 임금용, 박영서가 출연했고 타짜에서 비열한 보스, 곽철용을 연기한 김응수도 출연한다.
영화의 불편한 완성도에 한 몫 크게 하는 것이 바로 배우들의 연기다. 제대로 된 연기는 맥락없는 슬픔에서도 눈물 쏙 빼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예컨대 제대로 연기를 해준다면 아들이 엄마~하고 달려오고 엄마가 아들아~하면서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만으로도 뭉클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사카 슌야(안성 역)의 연기는 오발탄을 계속 쏴댄다. 그의 표정에는 슬픔, 좌절, 냉소, 자괴와 같은 감정히 복잡하게 읽히지만 표적이 없다. 여러 복잡한 감정들도 상황에 따라 무게감을 달리하는 법이다. 같은 슬픔 속에서도 좌절보다는 허무와 냉소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계선이 되는 가장 중심적인 감정을 잘 표현해야 관객의 공감을 얻고 그로부터 복잡한 감정들로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지만 여러감정이 단지 섞이기만 한다면, 중심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터뜨리기만 한다면 오발의 연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스틸컷이 별로 없다. 그나마 찡그리는 것은 잘 함.
하지만 그의 연기가 '경자'역의 나카무라 유리보다는 그나마 낫다. 그녀의 연기는 아예 터지지도 않는다. 터질듯 말듯 하다 그냥 식는다. 영화 내내 오리 입술을 하며 귀여운 척은 잘 하더니 울어야 할 땐 오만상을 찡그리며 눈물을 쥐어짜는 듯 싶다가, 그냥 만다. 일본에서 급부상 중인 여배우라고 하던데 무엇으로, 어디에서 급부상 중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결국 배우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감독의 몫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무작정 배우 탓만 할 것도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끊임없이 상기해 주고 거기서 왜 그런 감정이 생기는지 설득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 아니던가.
그녀의 연기는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재일교포 3세로 한국이름이 성유리라고 한다. 외모, 이름, 연기. 비슷한 급이다.
이 영화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했지만 여전히 자신없는 것은 내가 그들, 재일조선인들의 삶과 슬픔과 울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뒷자리의 일본인 커플이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이 영화에서 놓친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전편보다 실패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다. 판타지를 벗고 보다 현실에 다가갔지만 소통에는 실패한 것 같다. 소통에 실패한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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