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영화는 극적인 긴장감이 긴박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극의 흐름이 미흡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전개가 느슨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결말부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이 지닌 목적성을 향해 영화가 극의 흐름을 일관되게 끌고나가는 의도덕분이다. 그리고 그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극속에서 뚜렷하게 보여지는 것은 유괴된 형호의 부모, 한경배와 오지선(김남주 역)의 급격한 심리적 변화와 종래에는 공황상태에 이르는 처절함의 정서이다. 극은 관객에게 심리적인 시소타기의 유희를 선사하는 대신 두 인물의 심리가 극도로 내려앉게 되는 중압감을 견뎌내길 요구한다. 영화는 하나의 가정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범인에 의해 패닉상태가 되어가는 부부의 심리를 통해 치열하게 묘사한다. 범인의 요구에 의해 서울시내를 종횡무진하고 전화를 통해 애원하고 분통을 터뜨려도 보지만 결국 그들은 형호를 만나지 못한다.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형호의 싸늘한 주검뿐이다. 44일간의 희망이 결국 시작부터 허구였음을 알게되기까지 끔찍한 희망고문안에서 탈진했던 부부의 사연은 그 사건의 절실함을 감정 토대로 대변한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이 작품은 의심을 얻을만한 여지도 분명하다. 영화가 품고 있는 진위가 영화의 홍보 혹은 관객을 자극하기 위한 방편은 아닌가라는 여지를 완전 부연하기는 쉽지가 않다. 극영화의 토대안에서 이 작품이 내세우는 현상수배극이라는 장르적인 개념의 상을 덧씌운 채 종래에는 영화라는 극의 형태까지도 하나의 진실규명을 위한 호소적 방편으로 활용되어버리는 모양새는 의도의 분명함과는 별개로 영화라는 장르적인 순기능 안에서 논란을 부를 여지도 있다. 물론 영화의 의도를 떠나 해갈되지 못한 진실을 시간이라는 무덤에서 끌어낸 점은 분명 영화가 지닌 사회적 소통 기능을 바람직하게 활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하나의 귀속적인 결론을 위해 영화라는 장르의 고유적인 형태를 훼손한 듯한 인상이 드는 것은 겸연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과감한 방식에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자식잃은 부모의 속타는 냄새. "괴물"에서 희봉(변희봉 역)의 대사 중 등장하는 이 대사는 마치 이 영화에서 확인될 듯 하다. 범인의 추악한 사리사욕에 대한 분노보다도 그 범인의 사리사욕안에서 한없이 이용당하고 내팽개쳐진 부모의 심정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는 "살인의 추억"에서 능욕당한 뒤 내버려진 여인들의 사체와 오버랩되는 씁쓸함이다. 물론 이 작품의 바람처럼 범인을 잡는다해도 현재의 법 테두리는 더이상 응징의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인면수심의 천태만상의 행위를 법적 효력이 무색해졌다고 해서 덮어두는 것 역시 인간적인 도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 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놈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놈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놈 목소리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이유는 그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대가 이 영화를 보는 그 순간 옆자리에서 자신에게 던지는 그 경고메세지를 보면서 기분나쁜 그 웃음소리를 흘릴지도 모르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섬뜩할 것도 같다. 어쨌든 필자가 하고싶은 말은, "너, 밥은 먹고 다니냐? (그게 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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