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렸을 때부터 싸구려 판타지가 좋았다. 특히 인간애, 평등, 박애 뭐 이런 것들을 내세운 것들에는 사족을 못 쓴다. 그것이 영화든 소설이든 드라마든지 간에. 그래서일까. 내가 쓰는 글도 내가 하는 말도 좀 싼티가 많이 나는 편이다. 그런데 비현실만큼 현실을 이겨내는 데 좋은 약도 없지 않나 싶다. 판타지가 현실 도피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현실 도피도 사실 이상에 대한 열망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판타지에는 이상에 대한 열망과 현실의 뼈아픈 절망이 함께 녹아있는 셈이다. 아마도 이런 점이 판타지의 치명적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일과에 지쳐서 잠시 쉬어가려고 극장에 들른 이들에게 제가 겪은 남루한 현실을 들이미는 건 나르시즘이고 또 일종의 폭력이다. 그래서 나는 김기덕류의 건조한 현실에 박수를 보내지 못한다.
그런데 요즘 영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오간다. 바로 '디워' 때문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영화를 둘러싼 여러가지 상황이 하나의 담론이 되었다. 그 심층에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모순성이 있다. 산업인가 예술인가라는 익숙한 논쟁 외에도 영화라는 매체가 과학적 발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예술로 자리잡았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논점이 된다. 최초의 영화라 여겨지는 '열차의 도착'을 과연 현재 의미의 영화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와 같다. '열차의 도착'을 보던 관객들이 놀라 뛰쳐나간 것처럼 '디워'의 화려한 CG에 관객들은 감탄한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중요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스크린 위에 현실을 움직이게 하는 것 나아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상을 재현해내는 기술력 자체도 영화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가. 영화가 소비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스토리텔링의 완성도에 있다. 물론 얼마나 비중을 두는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겠지만 영화는 엑스포에 전시되는 과학이 아니다. 영화를 평가하는 가장 핵심적인 골격은 기술력이 아니라 그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기술력 자체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다만 하나의 요소라는 것이다.
그런데 디워를 둘러싼 논쟁 중 더 중요한 것은 영화의 산업적 기능과 역할에 있다. 여기서는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일단 배제해야 한다. 많은 영화들이 스토리텔링에 실패하고 화려한 영상을 보여주는 데 실패하더라도 유명한 배우를 기용하거나 이슈를 창출하거나 단지 웃기는 것만으로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영화를 철저히 산업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소비를 창출해야 하므로 영화의 완성도보다는 광고와 마케팅이 더 중요하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개봉하는 공포영화, 연말이면 극장가를 점령하는 러브스토리, 방학이나 명절에 몰려드는 블록버스터. 겨울에 개봉하는 공포영화가 아닌 이상 이 영화들은 오로지 상품이다. '디워' 또한 상품이다. 그것도 700억 원의 직간접 비용이 소요된 어마어마한 상품이다. 그러나 이 상품이 유독 주목받고 수많은 논쟁을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영화와 여타 상품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가전이나 자동차 등 소비상품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고 믿으면서도 유독 영화라는 상품에는 그것이 작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달리 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영화가 꿈의 산업 즉 판타지를 판매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판타지는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오랜기간 판매되지 못한다. 많은 상품들이 몇 개월 아니 몇 년에 걸쳐 판매되고 소비되고 선택받는 데 반해 영화는 불과 몇 주에 걸쳐 판매되는 단발성 상품이다.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야 하므로 마케팅에 힘쓸 수 밖에 없다. 마케팅의 힘이 강력해지면 소비자의 취향이나 기호는 상관없어진다. 그래서 많은 영화사들이 마케팅에 더 많은 돈을 쓰고 더 많은 이슈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디워' 또한 판타지를 판매한다. 심형래 감독의 1인 마케팅은 대성공이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가히 엄청나다. 하지만 '디워'는 다른 상업영화들과는 많이 다르다. 판타지가 영화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외부에 있다. 배우도 아니고 이슈도 아니고 유머도 아니다. 이 점이 다른 상업영화들과 달리 논쟁적인 이유다. 관객은 영화 '디워'가 들려주는 판타지에 호응하지도, 귀기울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가 제작된 외부 환경이 더 중요하며 이것이 판타지를 만든다.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 미국에서의 개봉관 수, 감독 개인의 열정, 엄청난 제작비와 기술력, 한국 영화산업의 부흥과 같은, 심지어는 엔딩 크레딧에 삽입된 '아리랑'과 이무기라는 한국적 소재조차도 영화에 판타지라는 외피를 입히고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담론이 작용한다. 민족적 자존심과 산업적 성공, 여기에 세계화 담론까지. 이쯤되면 '디워'는 이미 영화가 아니다. 감독 자신도 기술과 과학으로 접근했을 뿐 아니라 관객도 외부적 환경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가 아무리 혹평을 하고 대들어봐야 소용이 없는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디워'는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
앞서 나는 김기덕류의 영화에는 박수를 보내지 못한다고 했다. 스크린 위에 맨몸같은 현실이 펼쳐지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판타지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디워'는 스크린 밖의 판타지다. 인터넷 게시판 위의 판타지이며 돈 위의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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