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몇년 전까지만 해도 마이클 베이 감독은 나에게 상당히 비호감스런 이미지로 남아있던 감독이었다. 물론 여름용 블럭버스터를 만드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 왔지만 그러는 와중에 순수한 오락성 위에다가 시덥지 않은 무게를 얹으려 한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괜히 또 미국이 전세계를 구한다는 영웅주의를 닭살돋으리만치 강조하고, 아직은 그리 소질이 없어보이는 감동도 어설프게 이끌어내려 하는 등의 시도들 말이다. 그래서 <아마겟돈>에서 아버지를 잃는 슬픔에 울부짖던 딸이 애인 만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뻐 날뛰는 모습이 싫었고, <타이타닉>의 대작 분위기를 따라가려 했지만 결국 한참 못 따라온 <진주만>의 멜로구조도 싫었다. 그러나 2005년 <아일랜드>를 내놓을 무렵, 나는 그가 사실은 <더 록>이라는 아주 걸출한 오락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다시 그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까지 어색하게 만드는 어설픈 감동이나 미국제일주의를 걷어버리니, 그의 영화가 얼마나 다시 재미있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그의 다음 작품이 이 <트랜스포머>라는 것은 더욱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아일랜드>는 복제인간이라는 시의적절한 사회적 소재라도 있었지 <트랜스포머>는 변신로봇이라는, 어른들은 어디까지나 "애들용"이라고 코웃음칠 것같은 소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적인 가벼움은 오히려 마이클 베이가 그의 장기를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인간이 끼어들 새가 없이 로봇들끼리의 싸움이니 미국이 세상을 구한다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할 겨를도 없다. 결론적으로,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가벼워보이는 <트랜스포머>는 사실 마이클 베이가 이런 여름용 블럭버스터를 얼마나 멋지게 만들어내는 감독인지를 증명하는 영화다.
때는 가까운 미래도 아니고 현재. 카타르 미군 기지가 의문의 물체로부터 습격을 받아 초토화가 된다. 초고난이도 해킹 기술을 가진 이 미지의 물체의 습격에 미국 정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한편 평범한 고등학생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는 이성친구를 제대로 만들어보고자 아버지에게 조르고 조른 끝에 허름하게나마 자가용 한대를 구입한다. 그런데 이 자가용이라는 게 이상한 낌새를 보이기 시작한다. 교내 킹카인 미카엘라(메간 폭스)와 함께 있는 와중에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드있는 음악을 제멋대로 틀지 않나, 제발로 가출했다가 돌아오지 않나, 어느 순간 두발로 선 사람 형상의 모습으로 변신하지 않나. 그런데 이러한 이상한 낌새는 점점 그 스케일이 커져간다. 하늘에서 괴상한 운석같은 물체가 떨어지더니 거기서 나온 로봇들이 모두들 샘 앞으로 집합한 것이 아니겠는가. 로봇들이 말하는 사연은 이렇다. 이 로봇들이 사는 행성인 사이버트론에선 전우주를 장악할 만한 힘을 주는 물체인 "큐브"를 둘러싸고 선의 편인 "오토봇"과 악의 편인 "디셉티콘"이 오랜시간 싸움을 벌여왔는데, 그 과정에서 이 큐브가 지구로 떨어졌고 디셉티콘들이 큐브를 찾기 위해 지구를 습격한 것이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이 큐브의 위치를 알려주는 열쇠를 바로 이 샘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다 못해 거의 무존재였던 소년에서 졸지에 지구를 구할 열쇠를 쥐게 된 샘. 외계에서 온 로봇들의 싸움으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지구. 과연 오토봇과 디셉티콘 중 승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이고, 지구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도 비교적 알려진 얼굴들이 나왔던 마이클 베이 감독의 전작들과는 달리 <트랜스포머>에는 우리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배우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인 샤이아 라보프나 조쉬 두하멜, 타이리스 깁슨 같은 경우는 미국에선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어도 우리나라에선 거의 생소한 얼굴이나 다름없는 배우들이고 심지어 여주인공 메간 폭스는 이 영화가 첫 주연작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조연급으로 출연하는 존 보이트나 존 터투로 정도가 익숙한 배우들. 그러나 이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모두들 안정되어 있다. 샤이아 라보프는 이 영화로 이제서야 우리나라에서 좀 얼굴을 알리게 될 배우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아역배우 출신으로 꾸준히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배우이다. 때문에 연기력 역시 다부진데, 이 영화에서도 소위 "아웃사이더"에 가깝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이성에 대한 관심이 어느때보다 큰, 온갖 호기심과 두려움 속에 거대한 작전 한 가운데에 서게 되는 소년의 모습을 훌륭히 소화하며 이 블럭버스터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없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차세대 섹시 스타로서의 이미지를 선보이며 내한하기도 했던 메간 폭스는 활동력 장난 아닌 영화 속 분위기에 걸맞게 건강한 비주얼과 자연스러운 연기로 적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력을 일일이 따지고 들어가는 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배우들의 면면이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들이 아니라 CG로 만들어진 로봇들이기 때문이다.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규모와 속도감, 사람 못지 않게 특성화된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실제 배우들 이상으로 로봇들의 매력과 개성을 표현하는 데 많은 것을 투자한 듯 보였다. 내가 로봇 메카닉에 큰 관심이 없어서 전문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하겠지만, 마치 실제 모형을 보는 앞에서 일일이 조립하는 듯 로봇 내부 구조의 기계적 메카니즘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세밀했다. 여느 전대물에서 보아왔던 단순무식한 변신기법을 완벽하게 비웃듯 신체부위 곳곳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퍼즐처럼 짜맞춰지고 배치되는 순간을 보고 있자면 그저 신기해서 입만 벌어질 따름이다. 그리하여 그저 평범한 자동차의 모습에서 탈바꿈한 하늘을 찌를 듯한 그들의 위용이란.
하지만 이들이 덩치만 크고 움직임은 둔한 여타 전대물 속 로봇들의 모습이냐 하면 당연히 아니올시다. 헐리웃의 날고 기는 CG 기술은 수십 수백톤은 될 이들의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람 키의 10배 이상은 되는 로봇들이 하늘과 땅을 넘나드는 스파이더맨 식의 액션을 펼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트랜스포머> 속 로봇들이 딱 그런 액션을 보여준다. "몸무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온몸으로 주장하기라도 하듯 공간 곳곳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펼치는 액션신, 이만큼 스피디한 이들이 펼치는 격투신은 <킹콩>에서 킹콩과 공룡들이 펼치던 격투신 이후로 오랜만에 나타난, 현실적으로 감히 감을 잡을 수 없는 규모의 스펙터클한 격투신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활동범위쯤은 새발의 피라는 듯 무지막지한 보폭으로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심지어는 <매트릭스> 식의 슬로우 모션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로봇들의 모습에, 지금껏 만화나 영화에서 보아 온 로봇 액션의 가장 발전한 형태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로봇들이 이렇게 시각적 위용만 자랑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각 로봇 캐릭터들에 고유한 성격을 대입시킴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 로봇들을 단순히 눈요기거리가 아니라 또 다른 배우로서 몰입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토봇 군단의 주장격으로서 작전 전체를 카리스마 있게 통솔할 줄 아는 옵티머스 프라임은 목소리에서부터 진중함이 묻어나면서 과묵하면서도 믿음직한 대장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샘의 자가용이기도 했던 범블비는 그런만큼 아마 샘과 가장 감성 코드가 맞을 듯한 연령대의 로봇으로, 샘의 활발함과 장난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그래서 샘과 범블비가 나누는 우정 또한 비슷한 또래 친구와의 우정처럼 느껴져 어렵지 않게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 반면 디셉티콘 군단의 주장인 메가트론은 삭막하게 생긴 비주얼에서 무자비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악당 캐릭터의 다크 포스를 그대로 뿜어내는 꽤나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또한 영화 중간중간에 수시로 나타나 아군의 진행을 방해하는 디셉티콘 군단 소속의 자그만 로봇은 흡사 <쥬라기 공원>의 벨로시랩터를 연상시키며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한다. 이처럼 <트랜스포머>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시각적 스케일은 물론 감성적 섬세함까지 곁들여지며 "변신로봇"하면 유치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며 존재감 뚜렷한 캐릭터로서 각인되었다.
인간보다 로봇들이 활약을 펼치기는 하지만, 이 장대한 규모 속에서도 마이클 베이 감독은 이번에도 유들유들한 유머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마이클 베이 감독은 전작들에서부터 물량공세로 분위기 실컷 잡다가도 어느 순간 유머를 선보이며 관객의 긴장을 적당히 풀어주는 장기를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과시한다. 초반 범블비와 막 인연이 닿게 된 샘이 범블비의 능력을 알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들, 오토봇 군단이 정식으로 샘의 수호자들이 된 이후 샘의 집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어딘가 독특한 사고방식을 지니신 듯한 샘의 부모님 등 생각보다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과 캐릭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어, 영화의 스케일에 심지어는 부담을 느끼더라도 그 부담을 어느 정도 풀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실 한국 사람의 입장에선 미국산 로봇보다는 일본 내지는 한국산 로봇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태권브이나 마징가제트, 건담, 에반게리온 등 한국이나 일본에서 온 로봇들은 많이 접해봤어도 미국에서 만들어진 로봇 캐릭터는 <트랜스포머>도 개봉 무렵 이전에는 인지도가 현격히 낮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많은 이들이 생소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에서 만들어진 변신로봇 영화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늘 일본 전대물에서 어설프게 만들어진 빌딩 세트 속에서 둔탁한 움직임으로 악당과 결투를 벌이는 로봇들의 모습만 봤기에, 더 이상 만들지 못할 것이 없을 헐리웃에서 이런 변신로봇의 액션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트랜스포머>를 보고 나니, 일본산 유명 로봇 캐릭터들도 죄다 헐리웃 영화화를 의뢰하고 싶을 만큼 로봇의 개성과 파괴력을 맘껏 살려낸 듯하다. 유치함과 부자연스러움은 줄고, 그만큼 그럴듯함과 자연스러움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변신로봇을 헐리웃 실사영화에서 만나리라곤 생각을 못했던 우리에게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어엿하게 보여준 이 영화는 그 대책없는 상상력의 날개만큼 그렇게 진지하게 나아가지 않는다. 변신로봇이라는 소재가 철저히 만화적 상상력에 기인하듯, 영화 속 대사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평화", "인류", "지구의 운명"과 같은 유치찬란하게 느껴지는 단어들은 어느 정도 수반되어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지구적 위기가 다가온다고 해서 여기에 현재적 의미를 심각하게 부여하지도 않는다. 전지구적 위기와 맞닥뜨린 미국 정부의 부산한 모습을 비추기는 하지만, 결국 지구를 지키는 건 로봇들이지 정부에 있는 인간들이 결정적으로 하는 일은 많지 않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지구의 위기 앞에서도 방에 드러누워서는 초코파이 더 달라고 떼를 쓰기만 한다.(이런 면을 보면 한편으로는 현재 미국 대통령에 대한 풍자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그만큼 영화는 인간 세상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나 철학적 메시지는 최대한 걷어내고, 선과 악의 극단적 대립구도를 지닌 로봇들 간의 단순하면서도 무지막지한 싸움으로 초대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별다른 생각 없이 상쾌하게 시청각적 쾌감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영화가 지나치게 생각이 없는 게 아니냐 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때론 온전히 즐기고자 만들어진 여름용 오락영화에 섣불리 생각할 거리가 들어갔다간 완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오히려 영화 본연의 재미를 흐려서 없느니만 못한 셈이 될 수 있다. 한쪽에선 으쓱해도 분명 한쪽에선 기분 언짢을 서투른 사회적 메시지를 걷어내고 천지를 넘나드는 로봇들간의 육탄전에만 온전히 온 신경을 집중하는 이 영화는 그래서 참 담백하고도 시원시원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탄탄함을 기대하기 어려운 단순한 스토리라인과 지구의 평화 어쩌고 하는 미인대회 속 식상한 멘트스러운 대사들은 로봇이 주인공인 만화 원작인 이상 어느 정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물론 <아이언 자이언트>처럼 이런 유치한 대사를 전혀 내뱉지 않는 로봇 영화도 있긴 하지만) 사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도 특별히 없는 듯하며, 로봇과 인간의 종족을 뛰어넘는 우정을 통해 약간의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긴 하나 노골적으로 감동을 이끌어내려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양념선에서 멈춘다. 정서적 감흥이 깊지 않고 나름의 의미심장한 철학도 없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한없이 얄팍하고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는 보고나서 뭐 하루고 이틀이고 여운이 남으라고 만들어진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대중"예술"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나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2시간짜리 엔터테인먼트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에서, <트랜스포머>는 그 쾌감의 한계치에 도전하는 영화다. 보고 나선 금방 잊혀질지 몰라도, 적어도 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눈과 귀를 뗄 수 없을 만큼 흥분하게 만드는 쾌감 말이다. 적어도 이런 분야의 영화에서, 마이클 베이 감독은 동급 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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